길위의단상

우정의 편지(1)

샌. 2007. 2. 13. 14:14

< 친구란 가까이 있을때는 그 존재를 잊어버리다가도 멀리 떨어지게 되면 그리워지게 되는가 보다. 평시에는 잘 만나지 않았는데, 친구 K가 7년 전 베트남에 파견나가 있었을 때에는 우리 둘 사이에 많은 메일이 오고갔다. 2000년에서 2002년까지 3년에 걸쳐 서로 주고받았던 200 통 가까이 되는 메일을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친구는 낯선 이국 생활에서 외로웠을 것이고, 나 또한 당시에 새로운 생활을 시도하던 터라친구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다시 옛 메일을 읽어보니 더욱 감회가 남다르다. 이곳에 그때의 마음들을 올려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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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은 지금 천둥 번개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네.

자네 말대로 다시 통신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시험적으로 메일을 보내네. 기계적 편리함을 의식적으로 외면해 왔지만 멀리 있는 자네를 가까이 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네.

제대로 수신이 되었다면 바로 연락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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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벗에게


이메일을 보았네. 우리도 문명의 이기를 외면만 할 수 없는 세상인 것 같아.

자연 속으로 한 발작 더 들어간 자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부럽고 좋아 보이네. 나도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길을 잘 좀 닦아 놓아주게.

세상사는 일이 여기라고 다른 게 없는 것 같아. 학교 내 여러 가지 일들이 나에게 많은 인내와 사고를 요구하고 있네. 다만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연습과, 가족간의 격려와 교회생활 등이 위로가 되고 있다네.

나 때문에 자네의 발걸음을 한발 뒤로 돌린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앞으로 자주 소식 전하도록 하세.

제수님과 두 따님도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고, 방학 때 생각나거든 이곳에 한번 들리도록 하게


200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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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멀어지니까 더 보고 싶은 친구여!


서울 하늘 아래 이웃 동네에 살 때는 연락 한 번 하기 힘들더니 이제야 비로소 자네의 빈 자리가 커져 보이네. 인간의 마음이란 다 그런가 봐. 서울과 호치민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역설적으로 자네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네.


귀농 운동을 하는 어떤 분의 글에서 '지리산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없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네.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의 느낌을 적은 내용인데 힘들어하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오르막이지만 반대편의 사람에게는 같은 길이 내리막이라는 거야. 땀 흘리며 걷던 그 길에서 오르막은 동시에 내리막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내용에 공감했었네.


어제는 아내의 운전 연수를 위해 가평, 팔당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네. 도중에 아침고요 수목원에 들렀는데 토요일 오후라선지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네. 오늘은 미사를 다녀온 후 집에서 쉬고 있네.


그곳 생활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참 많다네. 이국의 새로운 경험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게나.

이쪽 생활이나 생각도 자주 자주 열어 보이겠네. 귀찮게 여기지 말고 받아 주게나.


형수님(?)에게도 안부 전해 주게.


200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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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베트남생활도 어느새 3개월이 지났네. 정확하게 말하면 호치민생활이라고 해야 되겠지. 사람들은 호치민(과거의 사이공)을 보고 베트남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들 한다네.


우선 기후. 이곳 호치민은 사계절이 없이 항상 아열대기후인데, 한국의 여름보다는 덜 더운 것 같고,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한국의 더위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 5월부터 11월까지는 우기라고 하며, 매일 한번씩 소나기(스콜)가 내리는데 한두 시간씩 장대비가 시원하게 내린다네. 창밖 어디를 보아도 야자수, 거대한 파초(서유기에서 우마왕의 부인이 부치던 파초선), 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채로 서있는 바나나 나무들. 여기가 남국임을 항상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네


우리 집에 대한 묘사

조그만 5층 아파트단지인데 이촌동의 외국인전용아파트촌을 연상하면 비슷해. 대부분 한국사람이 많이 살고 있고, 한국회사와 베트남회사가 합작하여 건설 운영하는 10여동의 아파트와 정원이 잘 가꾸어져있고 수영장등도 있네. 단지의 출입이 엄격히 체크되고 있어서 안전에는 염려가 전혀 없는 곳이네. 단지에 기화요초들이 잘 심어져있어서 항상 향기가 가득하여 밤에 정원에 나가면 감동하곤 하지. 모든 꽃피는 나무는 일년 내내 계속 꽃을 피우는게 아닌가 싶어. 일년 내내 항상 꽃을 피우는 고장 호치민이 아닌가 하네. 같은 베트남이라도 북쪽의 하노이는 4계절이 뚜렷하여 이곳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모양인데 이번 방학 때 한번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약 40평형 아파트정도 될 것 같은데 방이 세 개와 창고방하나 욕실 두 개, 방마다 에어컨이 있어서 실내 온도 조절을 할 수 있네. 우리 사모님은 단지내 수영장에서 저녁 6시쯤 수영을 배우고 있네. 전에는 오전에 수영을 했는데 햇빛이 강해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스름한 시간을 이용한다고 하네.


저녁을 먹으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에 곧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네.

안녕.


2000. 5. 22. 오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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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베트남 소식(1) 잘 보았네. 여러가지로 신기하고 재미가 있어.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문명화된 서구보다도 오히려 느끼고 배우는 게 많을 것 같군. 앞으로도 재미있는 얘기 보따리를 많이 열어 보여 주게나. 꽃 얘기를 잠깐 했는데 내가 야생화 쪽에 조금 관심이 있거든, 그래서 올 봄에도 천마산과 축령산 쪽으로 우리 야생화를 만나러 여러 번 다녀왔었어. 그래서 그쪽에서 피는 꽃들은 어떤 종류인지 궁금하다네. 사람들이 화단에서 가꾸는 꽃이라든가, 산야에 피는 꽃들 얘기도 기회 닿는 대로 들려줬으면 좋겠네.


우리 학교에 30대 중반쯤 되는 처녀선생님이 계셔. 이 선생님은 방학 때면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네. 작년 여름방학 때는 티베트와 실크로드를 다녀왔고, 지난 겨울방학 때는 한 달간 베트남을 여행하고 왔네. 교내 전교조 소식지에서 그 기행문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주로 베트남 시골 농촌 마을로 다닌 것 같아. 농촌 사람들의 척박한 환경과 또 베트남 사람들 특유의 어떤 인정을 묘사한 것이 기억에 나네.

학교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 학교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또 한 사람은 지난 방학 때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천만 원을 은행에서 융자받아 유럽 여행을 다녀오더군. 돈이야 차차 갚으면 된다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 때에 보여줘야 한다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군. 꿈을 꾸는 것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인데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 용기를 주네.

또 시집을 낸 시인도 세 사람이나 있고,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여섯 분이나 되네. 생활하면서 이런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네.


팔불출이라 할지 모르지만 우리 딸 자랑도 좀 하겠네. 둘 다 심성도 착하고 공부도 스스로 알아서 잘 해 주고 있네. 이번 중간고사에서 큰 딸은 반에서 2등을 했더군. 자신은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러나 수능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희망하는 고대나 연대 쪽 입학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다만 나와 아이들과의 대화가 자꾸 없어지고 있어 안타깝네. 아이들이 성장하니까 서로 충돌도 생기고 그러다 보니 의사 교환을 피하게 되고, 이래서 지금 아내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 집은 아빠와 아이들 관계에서 문제 가정이 되어 있다네.


오늘은 기온이 올라서 반팔을 입고도 더위를 느낄 정도이네. 아마 30도는 된 것도 같네. 지금은 저녁 시간인데도 자꾸 부채질을 하고 있다네.


좋은 하루하루가 되길 비네.


200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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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우선 첫째가 그렇게 학업에 성취를 보이고 있다니 반갑고 축하하네. 우리 나이에 자녀의 성취를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있을까. 우리 집 두 아이와 부모의 관계가 이곳에 와서 좀더 좋아진 것 같네. 아무래도 서로간에 사랑과 격려가 더 필요한 곳이므로 또 같이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생긴 현상인 것 같아.


큰아이는 인터내셔널스쿨에 다니는데 이번 8월부터 11학년이 시작하네. 모든 수업을 외국인이 영어로 진행하므로 초기에 따라가기에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은데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니 안스럽기도 하네. 둘째 민중이는 한국학교에서 내가 데리고 있는데 틈틈히 우리 부부가 과외지도를 해주고 있지만 착하고 의젓하게 자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네. 학교에 생활에 귀감이 될만한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부럽네. 따스한 봄날에 야산에서 카메라의 화인더 속에서 야생화를 바라보는 자네의 모습이 상상되어 즐겁네. 정말 행복하고 좋은 순간들이 아닐까 하네.


이곳 거리 풍경.

여기서 가장 불편한 점은 더운 날씨보다는 교통문제일세.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은 물론이고,시내버스가 전혀 없고 비싼 택시도 별로 없다고 생각해보게. 언젠가 북경거리의 풍경에 자전거의 물결을 본 것 같은데, 이곳의 대중교통수단은 개개인이 소유한 오토바이일세. 따라서 거리에 나서면 온 길을 오토바이가 가득 메우고 있고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연이 상당히 심하고 소음도 심하네. 2-3년 전에는 자전거가 많았다고 하는데 베트남의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증거인지 오토바이가 굉장히 많다네. 그중에 '세옴'이라고 하는 영업용 오토바이가 있는데 우리아이들도 가끔 이용한다네. 오토바이의 뒤에 타고 목적지까지 태워주는 개인택시인셈이지. 세옴이 아니라도 거의 모든 오토바이 뒤에는 한사람 많게는 서너 사람까지 함께 타고 나닌다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자들도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하고 있고, 남자운전자의 뒤에(연인이 아니라도) 여자가 타고 남자를 지긋히 안고가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네. '시클로'라고 하는 짐과 손님을 나르는 세발 자전거가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지게꾼이 현대화에 밀려 사라지듯이 현재 사라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싶네.


여기서 오래 산 사람은 호치민시민을 보고 베트남인생활을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하는데 아마 농촌이나 타지역 사람의 생활은 훨씬 어렵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견문이 미치지는 못했네. 얼마 전에는 붕따우라고 하는 바닷가에 한번 다녀왔고, 베트콩 2개연대가 항상 숨어있었다고하는 구치땅굴, 그리고 시내에 있는 역사박물관, 기화사라고 하는 시내 공원에 갔었네. 붕따우는 호치민에서 약 2시간정도 되는 해수욕장인데, 우리나라 서해안같은 느낌을 주는 잔잔한 곳이었네. 구찌땅굴은 호치민관광에서 필수코스라고 하는데 땅속에 병원, 지휘소등 모든 생활시설이 있고 땅굴의 총연장이 250킬로나 된다고 하니, 베트남인의 끈질김과 저항정신 등을 느낄수 있는 곳이네. 호치민에서 약 1시간거리로 비교적 가까운 곳이네. 역사박물관은 우리의 구의동 대공원같은 공원내에 있는데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전쟁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네. 기화사는 조그만 소공원인데 기화요초를 잘 가꾸어서 마치 내가 서유기의 한 장면 속에 들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네.


매일 루틴한 생활을 보내면서 올 여름방학을 고대하고 있는데 이곳저곳 구경 좀 다닐까 하네. 어찌 보면 어렵고 지내기 힘든 환경이고, 어찌 보면 편하고 재미있는 환경이기도 한데 나는 어떤 쪽인지 아직 잘 모르겠네. 그러나, 평소와 전혀 다른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면 지금 꿈속인지 생시인지 하면서 집사람과 함께 웃곤 한다네. 아무튼 나는 지금 이상한곳에 있다네. 이곳 인터넷이 불안정하여 어제 보내는데 실패하고 오늘 교회 다녀와서 다시 시도하고 있네.

건강과 행운을 빌며..


200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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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소식 잘 받아 보았네.


호치민에서의 생활이 어떠한지 아직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차차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베트남에 있는 자네 모습이라면 많은 여가 시간과 자유로움,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 드라이브하며 견문을 넓히는 그런 쪽으로 상상을 했네. 몇 차례의 자네 편지를 읽어보면 내 예상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비슷하게 맞는 것도 같네. 사회주의 국가라서 어떤 통제가 있을 것도 같고, 아니면 개방 정책에 따라 우리 사회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도 같네. 바닷가 나들이 같은 먼 길은 어떻게 다녀오는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다니는가? 숙박이나 다른 행동도 완전히 자유로운가?


서울 한복판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산 사람에게 호치민의 환경은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아버지가 갖고 오신 베트남 칼라 화보집을 많이 보았네. 그 때 사이공이라든가 월남의 이미지는 밝고 화사한 인상이었던 게 아직 기억에 남아 있네. 우리가 겪은 근대화의 부작용을 베트남은 슬기롭게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네. 자네는 아마도 냉철한 관찰자가 될 수 있겠지. 베트남 사회에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 주게나.


지난 주말에는 고향에 다녀왔네. 시골집에는 어머님과 아흔 셋이 되신 외할머니, 두 분이서 사신다네. 면목동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던 자네는 외할머니를 잘 알걸세. 기억력이 자꾸 희미해지는 걸 제외하곤 아직 정정하시다네. 재작년에는 자전거에 부딪쳐 다리뼈가 부러지셨는데 다시 걷기 힘들거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쇠를 박아 넣는 수술을 받으시고 지금은 정상이 되셨네. 일어서시기 위해 노력한 아흔 노인의 의지력은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네.

어머니는 올해가 칠순이신데 동생들과 함께 여름방학 때 모시고 동남아 여행을 하려고 하네. 그 때면 아마도 자네 가까이로 지나갈 것도 같구만. 그러나 베트남을 들르는 코스는 없는 것 같아 자네를 만나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네.


농촌은 이제 모내기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더군. 가장 바쁠 때라는데 나는 고작 저녁 논에서 울려오는 개구리의 합창 소리와 시골집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것에 넋을 잃고 어울리지 않는 사치를 즐기다 왔네.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라는 시집에서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읽었네. 자네에게도 전해주고 싶네. 너무 도피적이고 감상적이라 생각할지 모르네만....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에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마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2000. 5. 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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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어제 오늘 서울지방은 33도 가까이 되는 여름 날씨를 보이고 있네. 소백산에는 철쭉제가 한창인데 갑자기 찾아온 더위를 감당하기가 좀 힘들군. 그래선지 몸과 마음이 축 처지면서 별 이유도 없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잦네. 점점 나이가 들수록 계절의 변화를 쉽게 쫓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 J 선생님이 자네 안부를 묻더군. 그 사람은 금년에 과학부장과 1학년부장에 담임까지 동시에 맡아 무척 바쁘다네.


5일 전(5/30)에 보낸 이메일을 받아 보았는지? 요사이는 우체통 수신함을 확인해 보는 게 매일의 일과가 되어 있네.


건강에 조심하게나.


2000. 6. 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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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소식 늦어 미안하네. 벌써 여름소식이라니 세월의 빠름이라니... 여기는 항상 여름이니 오히려 세월의 흐름에 둔감하네. 지금은 우기라서 하루에 한차례씩 시원한 소나기(스콜)이 약 한시간씩 쏟아지는데 청량제의 역할을 한다네.


언젠가 아무 때나 한번 들리게. 서울에서 5시간. 가까운 거리네. 항공료는 왕복 약 800불정도? 자네 야생화를 좋아하니 언제 카메라 메고 남국의 야생화 한번 즐겨보게나. 제수님과 함께. J에게는 우선 잘 있다고 안부전하고, 곧 교감연수를 받게 된다니 일단 축하와 기대한다고 해야 되겠지.


그러나 나는 자네가 부럽네. 학교의 관리자라는 자리가 여간 신경 쓰이고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고생하는 자리가 아니네. 그렇다고 월급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학교도 7월 15일 방학이네. 나는 방학만 손꼽아 기다리네. 쉬기도 하고, 여기저기 다녀보고도 싶고, 책도 좀 읽고 싶고,, 이메일 가끔 떠들 때마다 자네의 소식이 큰 위로가 된다네.

갑자기 무더워지는 때에 건강 주의하기 바라며..


2000.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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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소식 잘 받았네.

어떻게 된 건지 인생살이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더 바빠지고 욕심만 자꾸 생기는지 모르겠네. 40대가 되면 자식도 어느 정도 키우고 인생의 연륜도 쌓이고 심성도 더 넉넉해질 것 같던 젊을 때의 생각은 환상이었네. 도리어 더 두터워진 아집과 자기만족과 위선,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내 자화상이라네. 용서를 뇌이면서 남 비판하는 데는 은밀하게 더욱 예민해지고, 나를 비운다면서 또 다른 자기 집착에 빠져드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네. 자네 편지를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아비판을 해 보네. 살아갈수록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굴레는 점점 더 커져 보이고, 세상 문은 자꾸 닫혀 가는 것 같은 느낌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어린 시절 눈앞에 펼쳐져 있던 화려한 전망은 신기루였었네.


독일팀 모임을 7/1(토)에 관악산 등산으로 하기로 했네. 지금 회원들에게 연락중이네. 여러 사람이 자네의 안부를 묻고 있네. 자네가 떠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여름으로 접어드는군.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네.


특히 금년 들어서는 나이 먹은 것을 실감하고 있다네. 학교의 2학년 담임 14명 중에서 최고 연장자고, 과학과 13명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고, 어느 반 수업에 들어가서 본 그 반에 들어오시는 15명 선생님 중에서도 두 번째로 나이가 많더군. 이만하면 나도 교직생활 할 만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전에는 여기가 노인들만 있는 학교라고 불렸는데, 이젠 거꾸로 되어 버렸다네. 상대적으로 나는 앞으로 껑충 밀려나 버렸고.

또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서 한 아이로부터 할아버지라는 소리까지 들었네. 허허하고 웃어 넘겼지만 실제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네. 시골의 한 친구는 지난달에 벌써 딸을 출가시켰네.


지금 아내가 옆을 지나가면서 어째 가까이 있을 때는 일년에 한두 번도 만나지 않더니 멀리 떨어지니까 그리 자주 연락을 하느냐면서 핀잔을 주는군.


잘 지내게.


2000. 6. 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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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멀리 떨어져 한없이 외로울 때 자네의 소식을 보고, 이곳 소식을 쓰는 것이 큰 즐거움이네. 독일팀의 김선생님도 전화를 한번 주셨는데, 7월 1일 관악산 등산은 짧게 하고 산기슭 풍광좋은 음식점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를 바라네. 이곳 베트남(호치민)소식도 잘 전해주고 언젠가 베트남 방문계획도 의논해 보도록 하게.


자네의 나이타령을 듣고 보니 나도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군. 20대 초반의 대학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마음은 그때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도 않은데 나도 어느새 주위에 나보다 연장자가 거의 없네. 지난번 교회 수련회때 미래의 자신의 꿈 그리고 설명하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내가 뭘 그렸을 것 같은가. 마누라와 둘이서 손잡고 세계여행하는 그림이었네. 언제 좋은 시절이 오면 우리 내외끼리 한번 세계여행이라도 하세나.


얼마 전 학교에 인터넷교실 개통식을 가졌네. 학교가 벌판에 떨어져 있다보니. 전화는 무선이었는데 전화선 1선을 끌어다가 인터넷 전용으로 쓰고 있네. 이 이메일도 학교에서 처음으로 보내는 것일세.(지금까지는 집에서 사용). 모뎀을 이용하고 전송속도도 느려서 많이 불편하네. 우리 학교는 남사이공지역의 벌판에 있는데 학교 옆으로 사이공강이 흐르고 있다네. 서울의 강남과 비슷하네. 한참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으나, 학교 근처의 들판에는 자네가 좋아하는 이름모를 야생화도 많이 피어있네. 언제 카메라 메고 한번 방문하게.


사람 사는 일, 살면서 부대끼는 일이 이곳이 더 힘들지 않은가 하네. 서울은 익명성보장이랄까 신경 쓸 일이 별로 없는데, 이곳의 한국인사회는 좁아서 마치 시골의 한 부락과 비슷한 정서라고나 할까. 아무튼 신경 쓰고 살아야되니 상당히 피곤하다네. 7월 15일의 여름방학이 기다려지네.


잘 지내게.


2000. 6. 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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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여기는 온 나라가 남북 정상회담으로 들떠있네. TV는 낮밤 없이 특별방송을 하고, 어제 대통령의 평양 도착 장면은 학교의 전교실로도 방송이 되었네. 신문도 '김정일 쇼크' '평양 쇼크'라면서 약간은 지나칠 정도로 떠들고 있네.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한 논조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자본주의 언론의 생리가 그렇지 못한가 봐. 갑자기 북한을 미화하는 말과 프로그램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언론을 따라가다가는 정신이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다네.


자네의 호치민 생활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네. 그냥 쉽게 생각한다면 외국 생활에서 약간의 외로움은 있겠지만 이웃에 한국인들이 있고 또 가족과 함께니 큰 어려움은 없을 테고, 이곳에서의 관료 생활보다는 그래도 거기는 독립된 단위의 학교라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네. 지난번에도 썼었지만 사실 내가 상상하는 이국생활이란 호기심과 새로움과 끊임없는 자극이 결합된 조금은 낭만적인 것이네. 너무 단세포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여기서는 생각하지 못 하는 어떤 어려움도 많겠지? 음식이나 문화 생활면에서는 어떠한가?

아무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헤쳐나가길 빌겠네. 살면서 우리가 만나는 난관은 예비된 과정이며, 우리의 내적 성장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네.


인터넷 교실이 개설되었다니 축하하네. 학교 관리자로서 많이 신경이 쓰였겠구만. 그쪽 학교가 한국의 교육 과정을 따른다고 하니 여기와 비슷할 것도 같지만 그래도 학생 구성이나 분위기는 많이 다를 것도 같네. 학생들과 교사, 자네와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기서와 같이 교실 붕괴니 뭐니 하는 살벌한 말은 필요 없겠지?


다음에 다시 소식 전하겠네. 건강히 잘 지내길....


2000. 6. 1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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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자네의 답신을 기다리다 연락이 없어 다시 편지함을 열었네. 지난 번 메일(6/14)은 받아 보았는지? 아니면 바쁜 생활 때문인지?


여기는 어제부터 장마가 시작되었네. 그간 높은 습도와 찜통더위로 매우 힘들었는데, 시원한 빗줄기로 비로소 온 세상이 생기로 넘치고 있네. 그쪽의 스콜 위력도 아마 이러하지 않을까 생각되네.


인터넷의 베트남 사이트에서 자네가 근무하는 한인 학교와 또 한인 교회의 그림을 보았네. 아담한 모습이더군. 자네 때문에 나도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네. 신문이나 TV에서 베트남에 대한 보도는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되니 말이야. 그러나 보도 빈도로 본다면 베트남은 아직 우리에게 먼 나라인 듯 하네. 한국에 온 베트남 근로자들에 대한 소식과 과거의 월남전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으로 아쉽게도 유쾌한 소식은 드물 수밖에 없네.


어제 학교 선생님 상가에서 H를 잠깐 만났네. 어쩌다 보게 되는 동기들 모습이 예전보다 더 반갑게 느껴지네. 또 그들을 통해 내 모습을 읽기도 하고. 희연이가 이메일로 자네에게 연락 하겠다더군.


우리 학교는 기말고사가 7월 3일부터 시작되네. 어느덧 한 학기를 다 보낸 느낌이네. 여기도 방학은 7/15이네. 앞으로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유익하게 쓸 수 있도록 하세.


소식 기다리네.


2000. 6. 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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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소식 늦어 미안하네. 인터넷이 제때 걸려주지 않은 것으로 핑계하겠네. 우리 학교는 어제 기말고사가 끝났네. 설립 초기의 학교이고, 또 내년에 신축 건물로 이사하기로 되어있어서 학교 건축 문제로 요즈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네. 현재 사용하는 건물은 임대한 것이네. 조금이라고 마음에 들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싶은 욕심 때문에 더 피곤하지 않은가 하네.


서울에는 장마가 시작하여 한결 지내기가 좋을 것 같은데, 7월 초의 등산계획이 지장이 있을까 걱정되는군. 지금 밖에서는 소위 스콜이라는 소나기가 시작하고 있네. 우기에는 매일 한번씩 쏟아지는데 더위를 식혀주어서 오히려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네.


유치원과 초등 4학년까지는 6교시를 마치고 귀가(오후 2시 10분경)하였고 초등 5학년부터 고1까지는 8교시후 귀가(4시경)한다네. 교직원의 퇴근시간은 4시 30분이고.. 모두들 임대 봉고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출퇴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네. 나는 이번 여름방학이 특히 기다려지네. 전문직으로 들어가서 벌써 5년째 방학을 잊고 살았는데, 이곳은 더우기 외국이 아닌가. 매일 학교와 집을 왕복운동하다가 여기저기 좋다는 곳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네. 내가 구경한 곳들은 모두 묘사하여 자네에게 일러 주겠네만, 묘사력이 쇠하여서 전달이 될지 모르겠군.

여기서 근무하면서 느끼는 것이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일세. 객관적으로 보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일속에서 지내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우니 말일세. 장학사 시절에도 내가 죽는 소리 여러 번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보다 더 나

아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네. 어디까지나 주관적 느낌이지만, 원래 힘들다는 것이나 어려움이라는 것은 주관적 분야 아닌가.


밖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군. 남사이공 벌판의 사이공강가에도 작달비가 쏟아지고 있네. 조금 있으면 직원 종례가 있고 그다음 퇴근이네. 지금까지 여기 내 사무실에서 인터넷이 안되어 여러 번 실패하였는데 오늘은 성공하여 기분이 매우 좋다네. 집에서는 음악 시디를 주로 듣는다네. 명상에 잠겨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고, 또 집에 가면 정다운 가족이 있으니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가족간의 정을 느낀다네. 여기서 오히려 가족간의 사랑이 많이 회복되었다고나 할까.

두 딸도 이제 숙녀가 다되었겠군. 우리 두 아들을 보면서 생각하네. 전에 변산 상록해수욕장에 가족끼리 같이 갔던 추억이 생각나는군. 그때는 우리아이들 모두 초등학생이었는데. 우리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다음에 또 소식 전하겠네. 건강하게 지내고 또 즐겁게 지내도록 하게. 우리에게는 다시 오기 어려운 귀중한 시간임을 생각하면서..


2000. 6. 28


멀리 베트남 사이공강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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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지난 토요일 오후에 友德會 모임을 관악산에서 했네. 다행히 장마 사이에 난 맑은 날씨 덕분에 약간 덥기는 했지만 서울대 입구에서 연주대로 해서 사당으로 내려온 5시간이 걸린 정식 등산을 하였네. 밑에 내려오니 저녁 8시가 되더군. 하지가 지난지 얼마 안 되어선지 그 시간에도 산길을 걸을 만 하더군.

우덕회 회원 다섯 사람이 모였네. 올라가던 중턱에서 막걸리 한두 사발씩을 마시고 호기롭게 큰 소리도 치면서 독일에서의 인연을 되새겨 보았네.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더군. 회장님도 사업하시느라 바쁘고, 전 선생님은 올 봄에 교감 연수를 받으셨더군. 베트남은 겨울 방학 적당한 때 가능하면 부부 동반으로 가는 방향으로 해 보자고 간단히 얘기 나누었네. 그리고 사당역 부근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하고 헤어졌네.


며칠 전에는 민방위 해제 통지서를 받았네. 젊었을 때는 민방위를 마칠 나이가 아득히 멀게 보였었는데.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이 자주 이런 말도 하였지. 민방위마저 끝나면 인생 다 마친거라고.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은 종이쪽지 한 장이 주는 씁쓰레한 느낌은 어쩔 수 없더군.

이상하게도 자꾸 세월 얘기가 나오게 되네. 상록해수욕장에 함께 간 것이 한 십년전쯤 되던가? 그때 선운사 앞 식당에서 복분자술을 웃으며 맛보았지. 자네가 복분자의 의미를 설명했고, 벌써 이 술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느냐고 반문한 것도 같았네. 오줌줄기를 쏘는 맛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에는 그 효험을 기대해 보고도 싶은데.

이젠 떠나보내고 버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나이가 된 것은 사실인 것 같네.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인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네. 궁극적으로는 '나'를 비우고 죽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완성점이라는 생각도 드네.


학교 건축을 하자면 많은 신경이 쓰이겠구만. 작은 살 집 하나 짓는데도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닌데. 학교 옆을 흐른다는 사이공강이 옛날 이름으로 메콩강인가? 우리 학교 바로 옆도 한강이잖는가? 수업 비는 시간이면 가끔씩 한강가에 나가 앉아 있곤 한다네. 내가 보는 한강이나 자네가 보는 사이공강이나 서해와 태평양을 매개로 하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같은 강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네. 사이공강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주는 애잔한 느낌이 더하네. 실제 강 분위기는 어떠할지 모르지만. 월남에 관계되는 기억에 남아있는 명칭들이 사이공, 메콩강, 안남미같은 것들이네. 특히 어릴 때 먹어본 굵고 풀기 없는 안남미 쌀밥의 맛도 기억나네.


가벼운 농담 비슷하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막상 키보드를 두드리면 자꾸 무거워지는 걸 어쩔 수가 없네. 내 타고난 천성이 그러한가 봐.


어제에 이어 오늘도 따가운 여름 햇빛이 대지를 달구고 있네. 시원한 소나기 한 줄기가 그리워지는군.

임어당의 글에 이런 말이 소개되어 있지.

'때는 6월 어느 더운 날, 태양은 중천에 걸려있고, 산들바람 한 점 없다. 하늘에는 한 조각의 구름도 보이지 않는다. 앞뜰이나 뒷마당이 모두 가마 속같이 찐다. 나는 새는 그림자를 감춰 버리고 땀은 온 몸을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별안간 그때 우레 소리가 우르릉 우르릉 들려오며, 검은 구름이 겹겹이 하늘을 덮으면서 싸움터로 향하는 대군처럼 당당한 기세로 몰려온다. 다음 순간 처마에서 비가 폭포처럼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땀은 걷히고....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냐?'


작고 평범한 일에서도 감사하며 즐거움을 찾는 삶이 되도록 하세.


2000. 7. 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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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어제 보낸 메일이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네. 여기 이메일은 잘 걸리지 않기도 하지만 한 시간 이상이 되면 자동 로그아웃되어서 없어져버리는 경우도 있다네. 학기말 업무와 학교 건축 준비로 상당히 바쁜듯 싶네. 바쁘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쁘다면 바쁘고, 게으름피우자면 또 그렇고..


방금 사이공강가(정확히는 사이공강의 지류로서 이름은 '사이랍강')에 다녀왔네. 우리 학교를 하회마을처럼 둘러 지나가는 강이라고 저번에 얘기 했네만 학교 뒷문으로 잔디 같은 들풀이 나있는 벌판을 약 100미터정도 가면 강가에 닿는데 요즈음은 매일 한차례씩 가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린 것 같아. 혹시 다른 사람이 본다면 좀 이상하게 보일 것도 같아서 좀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강가에 가면 사이공강 특유의 탁류가 넘쳐흐르고 강너머에서는 이름모를 강새 소리가 들리고, 베트남 특유의 통통배들이 가끔 왕래하기도 하고, 어부가 그물을 던져서 새우나 조개를 걷어 올리기도 하고, 하여간 이국적이고 재미있어서 매일 나가보고 있다네. 또 건강을 생각해서 운동겸 하고 있네. 강가에서 보면 이곳이 메콩델타지역으로서 모두 평야이고 호치민시 인근에서는 전혀 산을 볼 수 없다네. 강변엔 열대식물인 물야자가 무성하고, 뻘들도 보이고 조그만 삿갓 모자를 쓴 월남인이 열심히 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이고, 월남 통통배는 모터선인데 배에서 숙식을 하는 그들의 집이라고 하는데 한 가족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네. 하여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주 나가는데 벌판에는 넓은 채송화꽃밭이 있는데 며칠 전부터 작은 삿갓을 쓴 베트남인들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않아 있길래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니 꽃밭의 풀을 뽑고 있는 것이었네. 베느남은 인건비가 아주 싸다네. 일당 이만동이나 삼만동(이천이백원정도, 1달러가 14000동)정도이므로 여기사는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메이드를 한두 명 쓰고 있는데 휴일도 없이 하루 열두시 간정도 일하는데 백만동(약 팔만원 정도?)안쪽이라네. 물론 우리도 탄 이라는 이름의 지적인 중년의 베트남인 메이드가 우리 집의 일을 도와주고 있네. 메이드는 우리 집이 처음이라는데,

아무튼 하루 종일 들판의 채송화꽃밭의 잡초를 뽑는 모습을 보니까 참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탄하는 마음도 들고, 그들의 꾀부릴 줄 모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베트남인들은 이삼십 년 전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여서 순수하고 친절하기도 하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메일 쓰는 도중에 총영사관과 한국학교이사장님과 통화하느라고 이메일 시작한 뒤 한 시간 반이 지났네. 발송이 잘 될지 모르겠는데 불안하니까 이만 줄이고 보내겠네.

건강하게 잘 지내도록하게


2000. 6. 30


추신 : 학교에서 메일발송에 실패하고 디스켓에 담아서 집에서 보내는 것일세.


2000. 7. 2일에 덧붙임

오늘 주일이네. 지난번 못 보낸 메일과 함께 소식 전하네.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베트남 교회를 방문하여 성가를 불렀네. 베트남 두 번째 교회네. 참으로 은혜스럽고 성가곡도 좋아서 눈시울이 시큼하였네.

이메일을 쓰는 중에 집에 손님이 오셨네. 우리학교 과학선생님인데 민중이가 클라리넷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가이드하고 악기를 구입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해서네. 나가서 접견해야 하므로 중간이지만 이만 줄이겠네.

관악산 등반소식은 정말 무더위중의 소나기 같은 행복한 소식이었네.

잘 지내게.


베트남에 있는 벗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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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메일 잘 받았네.

연결이 안 될 때가 있는 모양인데 지금까지는 별 이상 없이 잘 받고 있네.


이곳은 닷새째 맑고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네. 기온은 30도를 약간 넘지만 장마 기간이라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하네. TV에서는 밤더위를 피해 한강을 찾는 시민들 모습을 연일 보여주고 있네. 저 남쪽에서는 최초의 우리말 이름을 가진 '기러기'라는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는데 반가운 손님인양 기다려진다네.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간 여유는 많다네. 그러나 땡볕에 밖에 나갈 엄두는 못 내고 집에 일찍 들어와 부담 없는 소설을 읽고, 낮잠을 자기도 하며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네.


사이랍 강변의 정경을 전해 주어서 그곳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었네. 그리고 클라리넷을 배울려는 아이의 여유가 부럽네. 한국에서는 죽자 살자 식 공부 외에는 다른 데에 눈을 돌리기가 힘든 현실이잖는가?

지금 옆방에서 감기에 걸린 채 콜록거리며 잠 온다고 약도 안 먹고는 시험 준비를 하는 아이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네. 우리도 그런 시절을 겪으며 지내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조류에 무력하게 떠밀려 내려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네. 그렇다고 행동하는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오늘은 짧게 소식을 전하네.

잘 지내게.


2000. 7. 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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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요사이 매우 흥미 있는 책을 한 권 읽고 있네. 피에르 쌍소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일세. 새로 나온 신간이니까 자네가 접하기에는 한참 시간이 걸리겠지. 이 책의 머리말에 나오는 몇 구절을 옮겨 보았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나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로 강의 한가로움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흔적을 조금씩 그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시골의 작은 마을 카페, 하루의 노동을 끝낸 사내들이 가득 채운 포도주 잔을 높이 치켜든 채 그 붉고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응시한다. 지그시 바라보다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마시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들은 수세기를 이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해 간다. 아주 천천히, 그것은 영원에 가까운 느림이다.

.........

어쩌면 우리의 이성은 어쩔 수 없는 현대의 상황 앞에 그냥 굴복해 버리고 말자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로부터 결연히 벗어나자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 후자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등을 떼미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하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처럼 바쁘게 살아온 대가로 그동안 고이 아껴서 잘 감아왔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풀어가며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많은 과제들 때문에 시달리는 일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시간을. 하지만 우리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과연 그렇던가? 이상하게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군분투하는 피곤한 삶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을 항상 고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갈등 속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

나는 이런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우리에게 한결같은 평안함을 보장해 주는 몇 가지 태도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한가로이 거닐기: 나만의 시간을 내서 발걸음이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나를 맡겨 보면 어떨까?

듣기: 신뢰하는 이의 말에 완전히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권태: 이는 아무것에도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하고 애정을 느껴보면 어떨까?

꿈꾸기: 우리의 내면 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희미하면서도 예민한 의식을 때때로 일깨워 보는 것은 또 어떨까?

기다리기: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지평선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는 것은?

마음의 고향: 내 존재 깊은 곳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시대에도 맞지 않는 지나간 낡은 시간의 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면?

글쓰기: 우리 안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의 소리를 옮겨 보는 것은 어떨까?

포도주: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 그 순수한 액체에 빠져보는 것은?

모데라토 칸타빌레: 절제라기보다는 아끼는 태도, 그 방식을 따라 본다면?

...........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란 내게 주어진 행운, 그것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단 한 번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균형상으로 볼 때, 기쁨의 총체가 고통의 총체를 넘어선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삶을 행운의 기회로 여기는 까닭은 매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나 불만스러운 표정의 시작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내가 조금씩 아껴가며 꺼내 놓고 싶은 행운인 것이다.

삶,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좍 퍼져 나간다. 그것은 세차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한 작은 물방울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강한 힘이기보다는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부여된 이 삶이라는 특권을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 나는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라든가 영원에 가까운 허무 속으로 숨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만의 리듬에 맞추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조용히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고 그들에게 정중히 부탁하고 싶다.'


2000. 7. 1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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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11번째 글 잘 보았네

정말 무더운 여름날의 한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한 글일세

세상을 좀더 여유 있고 관망하며 살아가고 싶은 자네나 나에게 정말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동류의식을 느끼네.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네만...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생활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생활 속에서 엮어나가는 시간들이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한가로이 거닐기. 권태. 꿈꾸기 등.. 그러나 조용히 나의 길만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두 세계를 조정하고 관리해야 하며, 또 그러기 때문에 피에르 쌍소의 이야기가 더 달콤한 것이 아닌가. '느리게 산다는 의미'는 분명 흥미 있는 책일 것 같네. 읽어가면서 재미있는 내용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전해주기 바라네.


어제 15일 방학을 하였네. 5년 만에 맞는 방학이라 감회가 남다르고 즐겁네. 지금 계획은 베트남의 이름난 곳을 한번 다녀볼까 하네. 3월부터 지금까지 매일 출근하고 주일은 교회에 가고하여서 별로 가본 곳이 없네. 나중에 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안내할 수 있도록 사전 답사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영어공부나 하려고 하네. 외국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네.


이곳 여름은 매일 내리는 스콜 때문에 생각처럼 덥지 않다네. 오히려 한국보다 더 시원하지 않은가 생각하는데.. 어제 저녁에는 우리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두 부부가 귀국하게 되어서 우리 집 옆의 수영장 가에서 송별 식사를 하였네. 이곳은 어쩌면 커다란 정거장이 아닌가 하네. 몇 년간 머물다 떠나는... 나하고 비슷한 처지의 파견근무자(대부분 회사원)들은 한 삼사년 지나면 귀국하거나 딴 나라로 떠나고, 자영업자들 중 성공적인 분들은 비교적 오래동안 지내도 있고 여의치 않은 분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개인 소유가 허용되지 않네. 특히 외국인에게는. 그래서 집이나 회사를 개인소유로 살 수 없다네. 모두 월세를 살고있는 셈이지. 외국인에 대하여 제도적으로 영주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네. 요근래 또 일시 귀국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한국학교가 방학하면 자녀들과 함께 한국의 친척으로 바람 쏘이러 간다고나 할까.. 한국학교의 방학은 7월 15일부터 9월 4일까지 약 52일간일세.


또 소식 전하겠네. 잘 있게.


2000. 7.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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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방학을 한 후 바로 고향에 내려가서 며칠 보내다가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네.

중국으로는 내일 아침에 출발하네. 동생들은 못 가게 되고, 결국은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하는 여행이 되어 버렸네.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관광 자체에 대한 흥미는 별로 없지만,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이런 시간에 대한 기대는 크다네.


5박6일의 대체적인 일정.


7/21 심양 도착. 시내 관광. 연길로 이동.

7/22 백두산

7/23 용정, 두만강 관광. 북경으로 이동.

7/24 만리장성...

7/25 천안문광장....

7/26 용화궁 관광. 천진으로 이동. 귀국(18:00).


다녀와서 소식 전하겠네.

계획한 대로 보람 있는 방학이 되길 빌겠네.


2000. 7. 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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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오랫만에 맞은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힘든 여행을 하고 돌아왔네.

첫날부터 밤 11시에 호텔에 도착하게 되더니, 어떤 날은 12시간 동안을 버스와 비행기 안에서 보내기도 했네. 그것도 반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데 정말로 녹초가 되더군.


자작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수피가 하얀색인 아주 기품 있는 나무인데 주로 강원 이북에서 자라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네. 혹시 서울 근교에서 흰색 계통의 나무를 본 적이 있다면 그건 대부분 은수원사시라는 나무로 알면 되네. 이 자작나무 숲의 환상적인 모습을-특히 달밤에-그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 백두산 길에서 자작나무 숲을 약 30여분간 통과하면서 실컷 눈요기를 했네. 미끈하게 뻗어있는 하얀 색의 나무들 무리를 상상해 보게. 푸른 하늘에 흰 구름, 그리고 초록색 녹음 가운데 자로 그은 듯 수직으로 놓인 기하학적 무늬들.


山中吟이라는 백석의 시 한 구절이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두산은 지프로 천지 바로 밑까지 올라가게 되네.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는 정상 부근은 온통 푸른 초원지대인데 거기에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네. 백두산의 야생화 군락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네. 정말로 장관이었어. 키 작은 색색의 야생화들이 강풍에 흔들리며 온 산을 뒤덮고 있었네. 질주하는 지프 안에서의 주마간산이라도 좋았다네. 이에 비하면 나에게는 천지는 차라리 작아 보였네. 너무 많이 회자되어 조금은 심드렁해진 면도 있고, 20분 정도의 시간 동안에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사진 찍으랴 강풍을 피해 도망다니랴 시장터와 다름없었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백두산이었네.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르는데 가끔씩 중국 사람들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이 한국 관광객들로 우리 민족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어떤 마력을 갖고 있는 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


조금 후에 전주에 내려가야 되네. 후에 다시 소식 전하겠네.

좋은 방학 보내고 그쪽 소식도 자주 보내주게나.


2000. 7. 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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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메일을 열어본 때가 자네가 백두산 등반을 한 다음날이었네.

민족의 영산이고 언젠가는 한번은 가 보아야 할 그곳을 어머님을 모시고 다녀온 자네가 부럽네.

글로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즐거움과 풍광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네.


오랫만에 맞은 방학인데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얼떨떨하고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네. 날씨 탓인지 운동 부족인지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것 같네. 슬럼프에 가까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자네의 많은 격려를 부탁하네.


아이들과 함께 메콩델타지역을 1박 정도로 여행할까 하는데 다녀온 뒤로 보고하도록 하겠네.

반가운 소식 기다리며..


200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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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태풍이 비껴 지나가면서 서울에 가을 하늘이 나타났네. 남한산성에 올랐는데 옆의 사람이 저기에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로 맑고 깨끗했어. 이것이 자연의 본 모습인데, 그걸 잃어버리고 우리가 얻은 게 무언지 자문해 보게 되네.


오랜만에 맞는 방학이고 자유 시간이라 적응이 잘 안되는가 보지? 그러나 방학 전에는 얼마나 기다리며 소중하게 상상했던 시간들인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즐기길 바라네. 무료함, 외로움, 짜증나는 일, 슬럼프조차도 말일세. 새롭고 보람 있는 일만이 우리 삶을 반짝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런 것이 있음으로써 삶은 더욱 빛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네.

이번 전주에 내려가서는 아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을 처음으로 가 보았네. 자네 고향과 가까운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란 곳인데 마을과 옛 집도 들러보고, 바다 쪽으로 나가 동호해수욕장에도 가 보았네. 모래사장과 솔밭이 좋은 아담한 해수욕장이더군. 다만 흙탕물이 심한게 아쉬웠네. 옛날 자네가 바닷가에서 놀던 얘기를 자주 하지 않았던가? 산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하고 재미있게 듣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 바닷가가 여기 동호가 아닌가 싶어 감회가 새로웠네.


그리고 오가는 중에 전라도의 산야가 너무 마음을 끌었네. 넓은 들판에 아담히 앉은 산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했네. 그에 비하면 내가 자란 경상도의 산야는 거칠고 우락부락한 느낌을 받네. 경상도가 부성에 가깝다면 전라도는 모성에 가깝다고 할까, 순전히 내 주관적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런 한국적인 소담한 풍경에 자꾸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네. 백두산의 웅장함도 금강산의 화려함도 거기에는 미치지를 못 하는 것 같아. 마치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 맛 같다고 할까?

이번 백두산 여행을 부럽다고 했네만 사실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도 많이 있었네. 처음 생각은 어머니와 이번 기회에 많은 얘기도 나누고 정도 돈독히 하고 싶었지. 그러나 뜻대로 되지를 못했네. 도리어 앞으로 노인을 모시고 살게 될 때의 여러 어려움을 많이 체험했네. 자네도 장남이니까 공감을 하는 면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연세가 드신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자주 확인해야 된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네. 추억으로 많이 남아있는 것은 젊은 시절의 어머니 모습인데 훌쩍 세월이 지나 이젠 보호를 받으셔야 되는 현실도 마음 아프고, 또 노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특성들 때문에도 속상할 때가 있었네. 그래도 더 늙으시기 전에 모시고 백두산 여행을 한 것에 만족하네. 비록 좋은 아들 노릇을 하지는 못 했지만.

그리고 이번 중국 여행을 되돌아 생각해 보면 꼭 꿈속에서의 일 같아. 이상하게도 실제의 경험으로는 여겨지지 않아.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아주 특이한 느낌이야. 훗날 우리 삶의 종언을 고할 때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본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네. 인생은 하루 밤의 꿈과 같다고. 아니 실제로 꿈일지도 몰라. 또 인생을 나그네 길로 곧잘 비유하지 않던가. 그래, 인생은 무언지 알 수 없는 환상 여행일지도 몰라.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내 마음의 시골 고향' 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적어 보내네.

따분한 일상생활 속에는 항상 만나는 이웃, 해마다 찾아오는 사계절, 한 주일을 마감하는 매주 일요일, 날마다 뜨는 태양들에 섬세하게 집중할 수 있는 조심스러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차양 덧문을 여닫고, 낯선 사람 앞에서 수줍음 때문에 눈길을 다소곳이 내리깔고,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이웃끼리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장님의 연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하는 연인의 애간정을 태우고, 응석 부리는 노인 옆에서 잠시 시간을 지체하고, 아마추어 시인의 서투른 시에 귀를 기울여 주고, 빨리 어둠이 찾아온 겨울밤에 상점의 커튼을 내리고, 멀리 떨어진 친구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는 그런 조심스러움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분한 일상 생활은 형벌이 아니다. 도시 중심지에서 살아볼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게 강요되는 형벌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가고,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삶의 방식이다. 들뜨는 크리스마스, 신나는 독립 기념 축제일, 설레는 개학날, 젊은 처녀들의 수줍음, 소란떨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탈선 등등이 금방 눈에 띄게 되는 그런 단조롭고 친근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아주 긍정적인 경우엔, 이런 시골에서의 따분한 하루하루는 멜랑콜리이자 영혼의 황홀한 음악이 될 수 있다. 반면 삶에 대한 무기력증은 삶이 싫어진 것이기보다는 삶의 풍취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의 이런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그리 신중한 태도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한 건강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시대의 흐름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살 수 있는 사람, 즐겨 침묵을 택할 수 있는 사람, 지식이나 경험을 쌓기 위해 애쓸 때나, 시대의 격랑 속에서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조차도 즐겨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을.


2000. 8. 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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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요즈음은 하루에 한차례씩 스콜이 내려서 더위를 식혀주고 있네. 지금도 창밖에는 시원한 빗줄기가 넓은 파초잎 위에 비적을 그리면서 부딫쳐 부서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네.

자네의 편지를 열어 읽으면서 나의 머리 속에 내리는 또 하나의 스콜을 느끼고 있다네.


제수님의 고향이 해리인줄은 처음 알았네. 아마 나의 고향인 신림면 법지리도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가 느꼈던 것처럼 고창지방의 산야는 참 서정적이네. 얕으막한 언덕 같은 산에(산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에) 소나무 숲이 무리를 지어 서있고 초록빛 혹은 누런빛의 들판 모서리에 낮으막한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풍경은 바로 나의 마음에 새겨진 고향의 원형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자네의 고향인 안정을 지나갈 때도 아늑한 분지같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우리나라의 산야는 참 좋아. 우리가 그런 곳을 고향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큰 축복이 아닌가 하네. 아직도 도시의 삭막함에 덜 오염되어있어서 언제든지 가기만 하면 변함없이 반겨주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일세.


그래서 이곳 베트남에서도 도시를 벗어나서 시골길을 지날 때 유난히 더 눈에 힘을 주게 된다네. 이곳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인정 많고 소박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네. 다만 이곳은 아열대지역이라서 사철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록빛 일색일세. 초록색을 생명의 색으로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지만 지나치게 무성하니까 오히려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앙상한 나목숲이 더욱 그립네.


어머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다녀온 일을 다시 축하하네. 나도 장남으로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네. 심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발생할 문제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아마 자네와 나의 생각이 같지 않을까 하네. 우리 부모님은 분당에서 그대로 아직은 정정하게 지내시네. 홀로된 여동생이 하나 같이 지내고 있어서 안심이 되고 있고 약간의 생활비를 매월 보내드리고 있네. 아들이 멀리 떠나니까 이메일을 배우셔서 편지도 띄우시곤 한다네.


한세상 살아가는 것이 자네 이야기대로 한판 꿈이 아닌가 하네. 특히 이곳 베트남에서 문득 생각할 때 이게 꿈이 아닌가 하고 가족끼리 농담을 할 때도 있네. 가요제목에 '꿈결 같은 세상'이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인생을 한발 멀리 떨어져서 객관화하여 바라볼 때의 느낌인 것 같고 또 그렇게 보면서 살아야 할 필요도 있지 않은가 하네.


무더위에 건강하게 지내도록 하게.


200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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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이곳은 연 이틀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네. 그래선지 어느덧 여름도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 같다네.


비 오는 날을 골라 어제는 이천으로 귀농(?)을 한 친구를 찾아 갔었네. 이 친구는 나와 중,고등학교 동기인데 고대 법대를 나온 뒤 계속 회사 생활을 했었네. 그런데 IMF로 실직된 후 돈암동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열었는데 계속 적자만 쌓이니까 문 닫고 친척이 있는 시골로 혼자 내려가 있네. 대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있고, 살림하던 아내는 학원 강사로 나가며 생활비를 벌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이네. 한국은 아직도 일부 돈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피부로 느끼는 경제가 나아진 것 같지 않고, 회복하지 못 한 사람들이 주변에는 많이 있네.


성격이 낙천적인 이 친구는 그런대로 농촌 생활에 잘 적응하며 생활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속마음이야 남이 이해하기 힘들겠지. 밭농사도 하고, 건축 공사장에 나가 일도 하면서 내달에는 서울로 돈도 좀 부쳐줄 것 같다며 웃더군.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버스 유리창에 빗물은 흘러내리고, 주위는 어두워지고 마음은 무거웠네. 이 친구와는 이번에 새로운 인연을 하나 맺게 되었네. 친구가 곧 영세를 받는데 어쩌다 내가 대부를 서게 되었네. 친구 사이면서 영적으로는 대부-대자 관계가 된 셈이네.


비가 오는 날이 참 좋네. 보슬비에서 소나기까지, 또 계절에 따라 그 맛이 다 다르지 않은가. 비 내리는 정경과 빗소리, 그리고 거기에 젖어든 마음, 이런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예전에 자네가 자주 읊던 시를 기억하는가?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말없이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로 시작하는 시였지.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리듬감이 참 좋았는데, 자네가 만화책에서 보고 외우게 되었다고 했을 때 둘이 함께 웃었던 기억도 나는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주요한 의 '빗소리'라는 시였어.


방학을 잘 보내고 있겠지? 주변도 많이 둘러보고 재미있는 소식도 전해 주게나. 중국은 개방 때문이겠지만 자본주의의 물결이 거대한 해일로 덮쳐 오는 것 같은 분위기였네. 긍정적인 면도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면도 여러 군데서 눈에 띄었네. 심양에 갔을 때 서탑 거리를 관광한다기에 굉장히 기대가 컸었거든. '혼불'에선가 어디서 일제 시대에 서탑 거리의 어려운 조선족 생활에 대한 묘사가 생각나서였는데, 지금의 서탑 거리는 온통 소비적인 자본주의 간판으로 도배가 되어 있더군. 마사지, 노래방, 사우나, 호텔, 주점, 그리고 무수한 한국식 음식점들로. 그리고 관광지마다 극악스럽게 달라붙는 중국의 장사꾼들로 매우 괴로웠네. 체면도 염치도 없는 것 같았는데 물론 일반적 중국인 모습은 아닐 것으로 이해하네.


다음에 다시 소식 전하겠네. 건강하게 지내길 빌며...


2000. 8. 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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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늦었네.

방학을 많이 기대하고 고대했었는데, 역시 뭐든지 기다릴 때가 가장 좋을 때가 아닌가 하네. 물론 여유시간을 잘 지내고 있네.


우선 우리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아이들의 공부도 지도하면서 가족애랄까 돈독히 하는 시간들이 즐겁네. 아무래도 외국이다 보니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의 존재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러한 점이 국내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우리 큰애는 여기 국제학교에서 다음주 화요일부터 11학년 1학기가 시작이네. 내가 여기에 온 결과 가장 큰 변화가 큰 애의 미래가 아닌가 하는데, 본인도 미국 등 외국의 대학을 염두에 두고 노력하고 있다네. 영어공부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곳 환경이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제와 어제는 여기서 약 200킬로 떨어진 판티엣 이라는 해변 휴양지에 네 명의 가족이 함께 다녀왔네. 소식이 늦어진 것도 다녀온 뒤 소식을 보낼까 해서였네


모처럼 호치민 시내를 벗어나서 베트남의 시골 풍경을 잘 볼 수 있는 기회였네

약 3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인데, 숙소는 휴양지의 호텔로서 제일 비싼 곳이라고 하며 1박에 약 70불정도(약 7만원)로서 국내보다는 상당히 싸지 않을까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다른 호텔들은 약 40불정도 한다는데 방을 구할 수 없었네.


낮에는 햇빛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후 4시 이후에 들어가서 파도와 놀았는데 남지나해의 바다 풍경이 한국과 많이 다르고 이국적이었네. 밤바다의 오징어잡이 어선의 불빛은 한국과 다름이 없는 것 같고.. 갑자기 한쪽 하늘에 시커먼 적란운이 생기면서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리다가 또 사라지는 모양도 관찰할 수 있어서 신기한 기분이었네


이곳 판티엣은 호치민에 사는 한국인의 필수 관광코스의 하나로서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 한번씩 들리는 곳이네. 또 부근에 모래사막 같은 구릉지대가 있는데 가보니까 베트남사람들도 많이 와서 구경하고 가는 곳이더군. 신기하기도 하고 베트남의 자연 환경이 우리 한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볼거리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네.


지난번의 메콩델타지역은 메콩강을 줄기로 하여 거미줄처럼 펼쳐진 조그만 수로를 따라서 선상여행을 하는 것이 이국적이었는데, 판티엣은 또 다른 풍경이었네. 언젠가 자네와 함께 즐길 시간이 있기를 바라네.


내일부터는 용기를 내어서 아내와 함께 베트남 여러 곳을 한번 구경하려고 하네. 큰애는 다음주 화요일이 개학이고 둘째는 따라가기 싫다는군. 두 내외만 모처럼 여행을 하게 되어 기대가 크네.


달랏, 나트랑(나짱), 호이안, 후에 등인데 여기 사람들이 대체로 추천하는 곳들이네. 한국으로 말한다면 경주 설악산 남해안 등등이라고나 할까. 신카페라고 하는 여행사에서 하는 오픈투어인데 약 4박 정도를 예상하고 있네. 호치민에서 목적지인 후에까지 약 1800킬로 정도인데 비행기로 호치민에 되돌아올 여정이네


원래 이 오픈투어의 최종목적지는 하노이까지인데 너무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중부지방인 후에에서 되돌아오기로 한 것일세. 베트남이 남북으로 상당히 긴 나라이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 차로 하노이까지 가는 것은 무리이고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한다네.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넓은 파초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시작되었네. 우리 둘째아이는 교회예배 후 친구들과 만나 놀다가 이제 들어와서 인사를 하는군.


이렇게 아들방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네에게 메일을 작성하는 시간이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일세. 물론 메일을 열어 읽을 때에는 더욱 그렇고.. 자네가 지난번 메일에서 인용하였던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이랄까. 많은 위로와 도움이 되었네.


이웃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빌려주어서 조금 보고 있는 중이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까지 허락된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네.


여행을 다녀와서 또 만나도록 하세. 물론 일렉트론의 도움을 받아서이지만.. 건강하고 보람 있게 방학을 마무리하기를...

수진의 대입준비에 격려를, 수연양과 제수께도 안부를 전하고 싶네.


2000.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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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여행은 잘 다녀왔는가? 즐거운 여행이 되었길 바라네. 베트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으니까 자네의 설명에만 기대는 도리밖에는 없겠군.


이 곳은 입추도 지나고 바람을 통해서는 약하나마 가을의 기운도 느껴지네. 숲에서는 매미들과 여름 곤충들의 마지막 사랑의 세레나데가 한창이라네. 또 사회적으로는 요 며칠간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온 나라가 들떠있네. 북한 항공기가 김포에 내리고, 곧 남북 사이에 철로와 육로가 연결될 계획이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이 어지러울 정도네. 8/15에 장위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일이 있었는데 입당 성가로 애국가를, 마침 성가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게 되어 놀라왔네. 독일식으로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네. 가장 놀라운 것은 TV로 비치는 김정일의 개방적인 언행이네. 파격적이고 화끈한 모습이 북쪽 사회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네. 정말로 이번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졌으면 하네. 또 그럴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점점 높아가는 분위기라네.


노자를 읽고 있다니 반갑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성서 다음으로 노자와 장자일세. 좀 건방지게 얘기한다면 내 사고의 많은 부분이 성서와 노장 사상의 짬뽕으로 되어 있다고도 느껴지네.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는 읽어보지 못 했지만 지난 겨울 강의를 TV에서 자주 보았네. 시청률이 상당히 높았고, 그 탓인지 지금 다시 EBS에서 재방송을 하고 있네. 노자의 첫 구절이 道可道非常道가 아닌가? 道란 학문의 대상이기 보다는 체험과 깨달음이라는 뜻 같기도 하고, 글과 변설이 화려할수록 도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경고로도 들리네. 화려한 엔터테이너(entertainer)로서의 도올의 강의를 들으며 사람들이 노자의 사상보다는 도올이 주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즐기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네. 그러나 도올이 많은 사람들을 노자에 관심을 갖게 한 공헌은 인정해야겠지. 앞으로 노자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으면 하네.


남은 방학 잘 지내도록 하게. 나는 초반 이외에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오전에는 산에 다녀와서 늦은 점심을 들고 쉬는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네. 덕분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거의 한 번씩 다 찾아보게 되었네. 남한산, 대모산, 구룡산, 아차산, 용마산, 남산, 안산, 인왕산, 불암산, 수락산, 청계산, 검단산, 개화산, 우면산, 관악산등. 이제 도봉, 북한등 서너 개의 산만 오르면 한 바퀴 순례를 하는 셈이네. 아마도 올해가 서울 생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네. 68년에 올라와서 어느덧 33년째가 되는 긴 세월이었네.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한대로 연말에는 경기도 여주로 전보 신청을 할 계획이네. 아파트도 팔려고 진작 내 놓았는데 요사이 집값이 떨어져서 매매가 잘 되지 않고 있네.


다녀온 여행 얘기를 부탁하네. 좋은 생활 되기를 빌며...


2000. 8. 18.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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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10일간의 베트남 여행에서 오늘아침 돌아왔네.

제일먼저 자네의 메일을 열게 되고 또 즐거움을, 이번에는 또 놀라움까지 발견하네. 한국의 급변하는 정세가 자네의 한 줄 글로서도 충분히 느껴지네. 우리나라 언론의 기질에다가 우리 민족의 최대 이슈인 북한과의 관계문제 아닌가. 그런 와중에서도 차분하고 침착한 자네의 발걸음을 보고는 뭔가 모르게 알알이 영글어가는 가을의 벌판을 떠올리게 되네. 방학동안 여러 산들을 순회하면서 자네의 발과 가슴의 근육도 더욱 단단해졌을 터이고, 자네의 영혼도 더욱 맑아지고 새로워졌을 줄 아네.

여주로의 이전은 다른 각도로 좀더 고려해보기를 바라네. 아파트는 왜 팔려고 하는가? 자녀를 위해서도 전세로라도 남겨두는 것이 어떤가.

이번 베트남 여행은 아내와 단 둘이서 다녀왔네. 신혼여행이후 둘만의 여행은 처음이지 않은가 십네. 호치민-달랏-나쨩-호이안-후에 코스인데, 베트남의 북부 하노이를 제외하고 남 중부를 주마간산격으로 본 셈이네. 신까페라고 하는 여행사에서 하는 오픈투어를 이용하였는데, 젊은 외국의 여행자들과 함께 섞여서 하는 여행이 즐겁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였네.

느낌은 참 베트남이 상당히 큰 나라이고 다양한 풍광을 소유한 나라라는 생각일세. 후에까지 거리로 약 1100킬로미터인데 지도상으로는 베트남의 가운데쯤일세. 호치민(사이공)지역은 메콩델타라고 하여서 혈관처럼 연결된 수로들과 수시간을 가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야와 야자나무들로 특징지워지네. 달랏은 해발 2000미터 이상 되는 고원지대에 형성된 소도시로서 휴양도시인데, 기온이 선선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네. 인상적인 것은 사이공지역에서 볼 수 없는 소나무들이 늘씬하게 빽빽하게 산야를 뒤덥고 있는 풍경이었네. 백암온천 가는 골짜기에 쪽 뻗은 소나무숲을 연상케 하는 탐스런 모습이었네

베트남에는 약 20여개의 소수민족들이 원시적인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고 베트남이 우리보다 더 다양하고 큰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주네 나쨩은 나트랑이라고도 하는데 해안 여러 섬 투어가 인상적이었네. 섬 부근에 배를 세우고 수영과 스노클링을 하는 것인데 재미있었네.

호이안은 한자로 회안(會安)인데 300년 전 중국과 일본 베트남 상인들이 모여서 무역을 하던 도시인데 300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활용되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였네. 후에는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슷한 성격의 도시인데 1800년부터 약 150년간의 왕도로서 왕궁과 무덤 절 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네.

우리와는 많이 다르고 오히려 중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베트남이 생각보다 중국과 가깝고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 같네. 베트남의 문화는 수천년동안 중국의 직접 통치등을 받으면서 영향을 받다가 1800년부터 약 10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는데 전국 곳곳에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서 중국 것과 묘하게 섞여있다는 느낌을 받았네.

전에는 한자를 썼었는데 프랑스가 베트남 말에 맞도록 영어 알파벳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한자를 잃어버린 나라가 되었네. 예를 들면 호이안은 한자에서 온 지명인데 쓰기는 Hoian으로 쓴다는 식일세. 사람이름도 원전은 모두 한자인데 그걸 영어 알파벳으로 쓰고 있으니 혼란스럽다네. 李太祖를 LE THAI CHU라고 쓰는 식일세.

호치민의 풍광은 베트남 전체로 본다면 몹시 특이한 지역이고 대부분은 우리나라보다 더 험악한 산악, 우리 동해안 같은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과 곳곳의 평야에서 이모작 삼모작으로 계절 다르게 익어가는 벼농사, 친절한 인심 등 우리나라의 60년대 모습도 있고 현대적인 모습도 섞여있네. 시내 관광은 세옴이라고 하는 오토바이기사 뒤에 타고 하였는데 재미있었네.


이제 여름방학도 어느새 며칠 남지 않았네. 남은 기간 건강하게 잘 보내도록 하고 자네의 산행기도 가끔 소개해 주기 바라네.


200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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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다녀온 여행 얘기를 흥미롭게 읽었네. 부부가 오붓하게 즐거운 여행을 한 것을 축하하네. 그것이 다 베트남에서 생활하는 여유가 아닌가 하네. 베트남이 생각보다 큰 나라이고 다양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네. 또 거기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침엽수인 소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네. 그리고 베트남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베트남 글은 없는가? 그 나라의 공용어는 무엇인가? 수천년 간 한자를 써 왔다고 했는데 프랑스 통치 백년 이후에 한자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드네. 물론 백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24일에 개학을 하고 지금은 매우 고생을 하고 있네. 생활 리듬이 바뀌고 또 기온이 급락하여 몸이 잘 적응하지 못 하는 것 같네. 서울의 날씨는 며칠간 계속 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밤이면 창을 닫고 이불을 꺼내 덮어야 할 정도가 되었네. 몸살기가 생기는 것 같아 요즘은 긴 팔 옷을 입고 다니고 있다네. 1주일 전만해도 에어컨을 틀어야 될 정도로 늦더위가 대단했는데 자연의 변화가 보통 불연속적이 아니네. 하기사 추석이 20일도 못 남았으니.


여주로의 歸本(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귀향이나 귀농과 비슷하게 이름 붙여 보았네)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네의 좋은 충고를 부탁하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기 문제로 반대를 하고 있네. 망상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짓이라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네. 사실 처음에는 이번에 명퇴할 생각까지도 했었다네. 그건 포기했지만 사람들과 시각차가 커서 내 진심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 하면서 면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네. 그래서 이젠 그런 얘기는 삼가하고 있네. 자네에게는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싶지만 막상 글로 쓰려니 막막해 지는 심정이네. 앞으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해 나갔으면 하네.


서울에서는 두 아이들만 살게 될 테니까 지금 아파트는 팔아서 20평 정도의 작은 것으로 바꿀려고 하네. 그 차액으로 여주에서 살 집을 만들 계획이네. 다만 내년에는 고3 짜리가 있으니까 아내가 서울에 있어야 할 것이고, 여주에서는 홀아비 생활이 불가피할 것 같네. 그리고 교직 생활은 앞으로 약 4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네. 지금 완전한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가슴에 떠오르는 어떤 생활을 한번 해 보고 싶네.


자네가 내 메일을 기다려 준다니 고맙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서울과 호치민으로 수만리 떨어져서야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이국 생활에서 느낄 향수도 잘 소화해 내면서 건강하게 지내길 비네.


2000. 8. 2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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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독이 조금 남아있네.

우리 나이에 열흘간의 오픈투어(일종의 배낭여행)이 힘겨웠던 모양일세. 베트남의 산야는 한마디로 푸르름이었네. 더운 날씨에 끊임없이 내려주는 적당한 비 때문인데 우리나라의 여름풍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네. 우리나라와 달리 2모작, 3모작이 가능한 푸른 평야가 부러웠네.

베트남어는 내 생각에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네. 중국어에는 4성이 있는데 베트남어에는 6성이나 있어서 배우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네. 프랑스 신부가 영어 알파벳을 보급했다고 하는데, 100년이라는 세월은 약 2세대정도의 기간으로 한자가 전부 사라져 버리고 베트남어를 영어 알파벳으로(발음기호 비슷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어떨 때는 안스러운 민족으로 느낄 때가 있네. 그럴 때는 세종대왕님의 한글창제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네.


자네의 여주행에 관한 내용은 베트남에 오기 전에 자네와 심각하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네. 여기서 본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중의 하나가 획일주의와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사회분위기일세. 여기서도 보면 한국사람들끼리 갈등이나 다툼이 심한 것 같네.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에는 아무 부담이 없지만 한국 사람과 대면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식인데..


자네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분위기상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네. 자네의 오랜 고심과 검토에 대하여 내가 찬반의 견해를 붙이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네. 다만 생각의 방향을 여러 각도로 달리해보아서 실수하지 않도록 만전에 만전을 기하기를 바라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마음이랄까. 우리 나이가 이미 젊은이가 아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이 일반론적 생각이 아닌가 하네.


내가 듣기로는 시골의 교직생활이 서울에서 보다 훨씬 힘들다고 들었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훨씬 더 권위적인 학교분위기이고 방과 후 자율학습도 더 힘든 것 같고, 거의 자유시간이 없는 삭막한 분위기라고 하는데(언젠가 서울과 시골의 2년간 교환근무에 합의한 교사의 시골학교와 서울학교 생활을 비교하여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고, 시골에서 근무하다 올라온 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네)


또 서울대 동문회보에서 읽은 이야기 중에서 대기업 중역에서 자진 퇴사하여 평소에 꿈꾸어오던 생활을 실현하기 위하여 강원도에 허브나라라는 농장을 가꾸어 성공한 선배의 이야기도 생각이 나네.(서울공대출신인데 농업에 관심이 많아서 재학 중 농대에 청강하러 다니다가 농대생 아내를 얻은 사람의 스토리였네)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인이 많고 그중 극히 일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에 옮겨서 만족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들의 스토리도 여러 번 읽은 기억이 있네. 무엇보다도 나 자신도 꿈꾸는 그러한 미래이므로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본 적도 있고 장차 실천해보겠다는 의욕도 갖고 있다네.


물론 방법은 사람에 따라서 모두 약간씩 다를 것일세. 다만 어느 경우에나 우리가 끝까지 생활인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일세. 자네의 생각은 앞으로 좀더 여러 각도로 검토해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세.


바쁜 일상과 기후변화에 잘 적응하여 건강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라네.


2000.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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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하루 만에 답신을 받으니까 비로소 전자 매체의 혜택이 더욱 실감나는군.

10일간의 여행이었다면 무척 힘들었을 걸세. 나도 중국에 다녀와서 며칠간을 잠만 자며 늘어져 있었네. 확실히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했었네. 걱정하던 형수님의 건강은 어떠한가? 아이들을 떼어두고 열흘간이나 여행을 떠난 두 부부의 용기도 칭찬받을 만 하군. 이번 여행을 다녀오는데 대략 어느 정도의 돈이 들었는가? 나중에 독일팀이 가게 된다면 경비를 얼마쯤 예상하면 될지 알고 싶어서 그러네.


여주에 대한 자네의 좋은 말 고맙게 생각하네. 그리고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네. 미래를 단순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도 사실이네. 그러나 얼마간의 무모함이 없다면 변화란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과 생활 쪽으로 고개를 돌릴수록 망설여지게 되고 결정은 어려워진다고 생각하네. 지금 입장에서 좀 염려가 되는 것은 발령받을 학교의 거리 문제와 자네가 얘기한 지방 학교의 관료적 분위기일세. 여러 여건상 중학교를 희망하고 있는데 내려갈 마을에는 가까운 학교가 없으니 먼 통근 거리를 각오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전에 양평에 갔을 때 거기 근무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지방 학교 분위기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네. 자네와 같은 말을 하더군. 권위적이고 또 지방민들과의 관계에선 익명성 보장이 되지 않아 행실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라고. 그러나 서울의 학교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더 나은 직장을 찾아 내려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네. 그래도 우선은 교환 교사 쪽으로 신청해 볼까하는 생각은 들기도 하네.


오늘은 내려갈 마을 소개를 좀 하겠네. 작년 1월달에 어떤 인연으로 이 마을과 만나게 되었네. 나에게는 소중하게 생각되는 이 신앙적 인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기로 하겠네. 산 속에 묻혀 있는 이 마을은 여주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곳이고 마을 뒷산을 넘으면 강원도 문막이네. 신륵사를 지나서 원주 쪽으로 가다가 좌회전해 꼬부랑 산길을 넘으면 나오는데 거기가 길의 끝이라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네. 요사이는 서울 사람들이 내려와 신식 전원주택을 짓는 바람에 좀 어수선해 지기는 했지만. 학교는 초등학교 분교가 하나 있네. 이 마을의 특징은 1800년대 가톨릭 박해 때 신자들이 피난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탓인지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네. 그리고 수녀회가 4 단체 들어와 있고 장애인 보육 시설도 있는 등 아주 종교적 분위기이네. 마을 한가운데는 역사가 오랜 공소(상주하는 신부님이 없는 성당)가 있네. 이런 여건이 그 당시 찾고 있던 조건과 일치되었고 내가 지향하고픈 생활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리라 판단했네. 그래서 얼마 뒤에 터를 사게 되었네. 대지와 전 약 500평으로 된 직사각형 땅인데 그 때 준비하고 있던 돈과 집에 있던 푼돈, 아이들 통장까지 터니까 딱 맞게 된 그런 금액이었네. 그 뒤에 패미리에서 아내가 성당을 통해 알고 지냈던 두 집이 거기에 내려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나의 경우도 그 곳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의 수녀님들로부터 많은 신앙적 도움을 받으며 지내고 있네. 이제 그 곳은 심정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이 되었네.


내가 생각하는 歸本은 좋은 자연 환경을 찾아 나서는 전원파 스타일도 아니고, 새로운 일거리에 도전하는 정열파도 아닌 좀 건방을 떤다면 영성적이고 근본에 가까운 생활을 해 보고 싶은 것이네. 생각과 생활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서울보다는 여주가 훨씬 나을 것 같다는 때문이지 다른 건 없네. 내년에 내려가지 못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조급한 것은 아니네. 그렇다고 몇 년 뒤로 미루어야 될 이유도 없다네. 지금은 집의 아내와 아이들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네. 모두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네. 그 곳에서 살면서 닥칠 어려움은 각오하고 있네. 세상적인 눈으로는 어쩌면 실패한 삶으로 보일 것이리라고도 예상되네. 그러나 수년간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 내적 욕구를 무시하기는 힘드네.


자네에게 설명을 하다 보니까 도리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네. 고맙게 생각하네. 내가 가지고 있는 독단적 견해 또는 어떤 집착 같은 게 이러면서 드러났으면 좋겠네. 그걸 벗어버리는 것은 한두 해에 될 일이 아니겠지만. 자네의 쓴 비판을 부탁하네. 비록 논쟁이 되더라도 서로의 성장에 유익할 것이라 믿고 있네.


딱딱한 얘기만 했으니 부드러운 시 두 편을 보내네. 나지막히 음송한다면 아마도 얼굴에 맑은 미소가 피어 오를 걸세.


<그만큼 행복한 날이 >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리 둘러메고

살금 살금 잠자리 쫒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 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꿈 >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논두렁 개울가에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밥 먹으라는

고함 소리도 잊어먹고

개울 위로 떠가는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열 다섯 살

소년이 되어보는


2000. 8. 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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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생겼네.

사정인즉, 우리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교사가 1명 계시는데 이번 9월 말 경 한국으로 귀국하려는 의사를 통보하였네. 우리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교사는 2년 동안 근무하는 계약교사일세. 희망하면 재계약하기도 하고 도중에 사임하기도 하네.

이곳이 타국이므로 평생 근무하는 우리나라의 학교환경과 조금 다르네. 이곳 교사의 약 절반은 이곳에서 자영업하거나 회사파견자의 부인(물론 교사자격증을 소지하거나 한국에서 교사를 하다 휴직하고 남편과 함께 온 분)이고, 약 절반은 한국에서 모집공고를 하여 선발한 분일세.

이곳에서 유능한 교사를 구하기가 불가능하네. 그래서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가능하면 3-40대, 사대후배면 더 좋고) 2년 기간으로 초빙하고자 한다네. 물론 본인과 학교에서 합의하면 계약 연장도 가능하네. 이때 본인은 본교와의 계약을 근거로 교육청에 고용휴직원을 제출하고 2년간 휴직해야 하며, 고용휴직의 경우는 경력 및 호봉승급이 원래대로 계속되므로 불이익이 없으며, 2년 후 복직원을 제출하면 다시 발령받게 되네.


원래는 공개모집을 하여야 하나, 만일 자네의 노력으로 적임자의 선발이 가능하다면 공개모집의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네. 대우와 생활환경은 대충 다음과 같네. 우선 보수는 월 약 2000불정도(220만원정도)이네. 그리고 왕복 부임 및 귀국항공료와 이사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네. 이곳은 물가와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1일 12시간 일하는 가정부의 월급이 10만원정도, 방3개정도의 주택임대료가 월 500불 이내, 생활비도 500불 이내-물론 씀씀이에 따라 다르지만, 자녀가 한국학교에 다니게 되면 학비 면제 및 중고생이면 대학입시에서 특례입학의 특혜도 받을 수 있네) 넉넉한 보수는 아니나 생활에 크게 어려움은 없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네.


한번쯤 해외생활을 해보고 싶은 유능한 수학교사가 있으면 가장 적합한 근무처가 아닌가 하네. 시간이 촉박하므로 자네가 여러 사람에게 연락해보고 희망하는 분이 있는지 빠른 시간내에 알고 싶네.

가능하면 지인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좋은 분을 고르는데 좋지 않을까 생각하여 부탁하는 것일세. 희망자가 있으면 곧바로 인적사항과 경력이나 특기사항 등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검토하고 회신하도록 하겠네.


새 학기의 바쁜 시간에 쉽지 않은 일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네. 만일 어려우면 어려운데로 연락해주면 다른 방법으로 구해보도록 하겠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도록 하고 회신 기다리겠네.


2000. 8. 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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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일을 열어보기 바로 전에 우리학교 수학교사를 구하는 메일을 먼저 보냈네. 자네의 사정을 잘 모르로 부탁하는 내용이므로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게.


우리 부부가 열흘간 다녀오는데 든 비용은 후에에서 호치민까지의 비행기삮 20만원정도(2명) 포함하여 40만원정도일세. 내 생각에 한국에서 온다면, 호치민시내및 근교관광 1박2일, 메콩델타 1박2일, 판티엣1박 달랏2박 나트랑2박 정도가 충분하고 경비는 숙식포함 1인

당 40만원 이내이면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숙소는 튄침대의 그저 지낼만한 장급호텔이 1박 10불(1만 1천원정도)였네. 식사는 한 끼에 넉넉잡고 5천원 정도면 될 것 같네. 교통비도 위에 언급한 지역 총 5만원 이내일 것 같고. 예상보다 훨씬 경비가 적게 드네. 호이안 후에등의 중부지방은 교통사정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각오가 충분하면 추가할 수도 있겠네. 내 생각에 여행경비는 왕복 비행기삮의 절반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네.


그건 그렇고, 여주에 대한 자네의 생각에 대하여 아내와 조금 이야기 해 보았네. 아내의 생각은 자네가 그렇게 원하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실천해야 된다고 이야기 하는군. 나도 아내의 판단을 상당히 존중하는 편일세.


우리가 베트남에 오기 전에도 상당히 고민하고 망서렸네. 예상 못할 어떤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만일 건강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아이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등.. 이러한 우려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을 하였고, 선택 후 경험하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어떨 때에는 괴롭기도 한 사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후회하지 않고 있네. 생각해보면 이러한 선택이 일시적 결정이 아니었고 몇 년동안 가슴에 품고 노력해오던 어떤 목표의 실천이 아니었는가 생각하네.


나는 자네의 "얼마간의 무모함이 없다면 변화란 어려운 것"이라는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네. 가족들이 흔쾌히 공감하고 지원해준다면 큰 문제는 없지 않은가 하네. 그리고 벌써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일을 절반쯤은 실천에 옮긴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자네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세속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나는 자네의 결정이 독단이거나 집착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누구나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순수한 꿈이나 동경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보내준 두 편의 시가 정말 마음에 드네. 우리에게 한없는 위안과 평안을 주는 소박한 과거의 추억들이네. 베트남에서 하루하루가 문득 낮설고 이상하기도해서 이게 꿈이 아닌가 하고 아내와 웃기도 한 때가 몇 번 있었네. 3년 지나 귀국해서 생각하면 정말 꿈속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하네.


오늘은 수학교사문제까지 더하여 두 차례나 메일을 쓰게 되었네.

가정에 행복과 건강과 축복이 항상 넘치기를 기원하면서...



2000. 8. 29.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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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C와 H에게 메일 내용을 보내고 알아보라고 했네.

자네의 이메일로 직접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가부간 소식이 갈 걸세.

우리 학교에는 적당한 사람이 없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물어보고 있는 중이네.

어제 자네 말을 들을 때는 금방 구할 것 같았는데 막상 찾아보니 마음같이 되지 않네.

내일 다시 소식 전하겠네.


2000. 8. 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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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주어 고맙네.

이번 좋은 수학교사를 초빙하는 것이 우리학교의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므로 최대한의 노력을 하려고 하네. 인터넷에도 초빙광고를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네. 무엇보다도 현직에 있는 후배라면 가장 좋겠지만, 가능한 서울의 현직 교사를 초빙하고 싶은 것이 욕심이네.


해외근무가 평소 생각치 않았던 사람에게 금방 결정하고 원하는 마음이 생기기 쉽지 않을 걸세. 그리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원하는 분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 또 대우나 현지여건 등이 가십거리로만 회자되는 것도 부담스럽고... 좋은 소식 있었으면 하네.

잘 있게.


200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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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자네의 부탁에 도움이 되지 못 해 미안하네.

몇 알아본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듣지 못 했네.

갑자기 떠나야 되는 일이라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것 같네.


어제는 명퇴 선생님 회식 자리에 참가해서 대취한 탓에 메일을 보내지 못 했네. 둘에게서는 소식이 왔는가? 좋은 사람을 빨리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나도 계속 알아보겠네.


방학이 끝나고 개학 준비하느라 바쁘겠구만.

다음에 다시 연락하세.


2000. 9. 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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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교사를 구하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는가?

대인 관계의 폭이 넓지 못하다보니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주지 못 해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곳 서울은 어제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기온이 뚝 떨어져 거리에는 긴 팔을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네. 그리고 학교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네. 아이들의 요구가 점점 거세져 우리 학교에는 두발 자유화 결정이 얼마 전에 내려졌네. 염색은 막고 있지만 그것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를 홍수를 앞둔 불안한 둑 같이 보여지네. 학교 운동장은 우레탄과 잔디를 깔기 위한 대공사중이네. 영화에서나 보던 파란 운동장이 현실로 다가오는데, 과연 험한 아이들의 발길에 온전하게 유지될지 걱정이 되기도 하네. 또 연금 문제가 요사이 큰 관심사라네. 공청회를 열면서 연금 축소와 여러가지 불이익 쪽으로 정부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아 불안한 면이 많다네. 특히 연금 개시 시점을 일정 나이 이후로 하는 것은 나의 歸本과도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문제네.


곧 추석이 다가오네. 외국에서 맞는 명절이라 쓸쓸한 느낌도 있을 것 같네. 6년 전 독일 뮌헨의 밤거리에서 쳐다보던 추석 만월이 생각나네. 그 때가 아마도 서울팀끼리 큰 맥주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한 사람 부축하며 숙소로 돌아가던 때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조금만 높이 올라간다면 서울과 호치민이라야 한 뼘 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만사 느긋하게 생각하며 편히 지나게. 고향에 다녀와서 다시 소식 전하겠네.


2000. 9. 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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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지금 여기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인데 비까지 내려 귀경길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네. 고향에는 아내와 둘이서 내려 가서 어제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 다녀온 후 바로 출발해서 올라 왔네. 그래도 7시간 30분이나 걸렸는데 가고 오는 길에서 온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것 같았네. 뒤에서 얌전히 따라오던 차가 졸았다면서 꽁무니를 들이받아 놀라기도 했네.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들이 반갑기도 했지만 장사를 하느라 지친 모습들이 안스럽기도 했네. 남동생이 둘인데 하나는 음식 장사를 하고 하나는 옷 장사를 하고 있네. 부부 함께 가게에 나가 직접 몸으로 뛰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고향집에 와서도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왔네.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는 인생의 여유로움과 평화를 즐길 수 있을런지, 아니면 이렇게 애만 쓰다가 어느 날 문득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지나 않을런지.


소식이 없는 것 보니 학기 초라 바쁜 모양이군. 원하는 수학 교사는 찾았는지 궁금하네. 최근에 읽은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보내네. 농민 시인인 박형진님이 쓴 걸세.


<사랑>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며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2000. 9. 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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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늦어 미안하네.

학기초라서 마음도 따라서 어수선하였네. 벌써 가을비라니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네. 이제 곧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겠지. 이곳은 항상 여름이라서 오히려 세월의 흐름에 무디어지는 것 같다네. 자네의 편지를 보고 한국의 계절과 비교하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껴본다네.

수학교사초빙건은 여기저기에 수소문 해놓고, 이메일에도 초빙소식을 띠운 결과 세분의 응모자가 있었네. 그중에서 한분을 초빙할까 하네. 요즘 느끼는게 사람이 하는 여러 가지 직업이나 일들 중에서도 사람 관리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네. 개성과 성격이 다른 여러 사람들을 한 가지 목적으로 방향을 집중시켜 노력하게 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하는 일이 많아. 많이 배우고 있다네.


자네가 보내준 시의 시어들이 참 아름답고 마음에 드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좋은 시가 주는 감동을 공유할 수 있어서 반갑네. 세상에 우리가 아무렇게나 보는 것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보고 또 그려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제 2학기가 시작되었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여러 가지 행사와 일들이 새로운 학기를 기다리고 있네. 마치 갈대숲을 헤쳐 나가듯이.. 마치 바닷물 속을 걸어가는 것 같이.. 또는 부드러운 공기 속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 같이.. 우리의 앞에 놓여진 길을 걸어가세.


수진이의 고3생활을 격려해주고 싶네. 인생의 힘든 고비를 넘기 위하여 어렵게 노력하는 나이 아닌가? 우리 휘중이도 그렇지만..

건강하게.


2000. 9. 15. 사이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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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소식 잘 보았네.

학기 초라 많이 바쁘겠지? 또 학교의 관리자로서 많은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러나 세상사는 일이 어찌 내 뜻대로 되어 주길 바랄 수 있겠는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는 말게. 신경을 써서 될 일이라면 많은 일들이 진작에 잘 풀려 나갔을 걸세.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세상 일이 엉뚱한데서 해결되고, 예상치 않은 사건들과 만나고 하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이네. 우리의 고뇌나 애쓰는 것이 핵심에서 빗나간 것이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좀더 가볍게 생각하고 생활해 주길 기대하겠네.


첫째는 숙대에 추천 입학 원서를 쓰고 있는 중이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네. 이제 수능도 50여일 남았는데 내신에 비해서 수능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걱정이네.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만 들어가도 만족해야겠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 갔다가, 독서실 갔다가 1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오네. 아이 못지않게 집사람도 고생하고 있네.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아이 비위 맞추느라 속은 안으로만 삭이고. 나는 아무 것도 해 주는 게 없지만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네. 휘중이는 미국쪽을 알아본다고 하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보도를 보니 여기도 얼마 전에 중고생 유학 박람회가 열렸는데 수만 명이 몰리는 붐을 일으켰다고 하더군. 조금만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한국의 교육 환경에서 탈출하고픈 사람들이 많은 것 같네.


이제 대기에는 가을의 내음이 점점 짙어지고 있네. 너무나 맑고 청명해서 도리어 서글퍼지는게 아닌가 싶은 계절이네. 책장에서 다시 '장자'를 꺼냈네.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계절병인 가을의 우울을 장자와 벗삼아 즐기려고 하네.


아름다운 시간들이 되길 빌면서....


2000. 9. 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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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사 초빙은 다행히 순조롭게 되었네. 아직 대면은 못하였지만 곧 부임하기로 하였네. 여러 가지로 애써준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네. 한국은 이제 가을이 한참이겠지. 풍성한 수확의 들판과 빨강색과 노란색, 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을 나뭇잎들이 그립네. 이곳은 거의 기후 변화가 없어서 한국과 같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가 쉽지 않네. 그러나 신기하게도 과일은 제철이 있어서 내가 처음 이곳에 온 3월에는 망고라는 과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없고 속이 노란 수박이 한창일세.


학교는 여름방학의 기억을 잊고 2학기를 지나가고 있네. 2학기에는 여러 가지 행사들이 많은데, 영어대회, 단축마라톤대회, 바자회, 백일장, 토론대회, 건축기공식, 체육대회, 축제 등.. 유초중고가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다보니 여러 가지 고려해야할 일도, 신경 써야할 일들도 많이 있네.


장자와 함께 가을을 지나고 있을 자네가 부럽네. 그리고 자네의 격려가 마치 청량한 샘물처럼 시원하게 해주고 한여름의 삼계탕처럼 기운을 내게 해주었네. 좋은 이야기 자주 부탁하네.

독일연수팀과 물리동문들 근황은 어떤가. 다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만 또 궁금하기도 하네.


10월 2일을 개교기념일로 하여 3일 연휴가 시작되네. 이번은 조용히 집에서 지낼까 하네. 지난 여름방학에 베트남 이곳저곳을 다닌것이 지금 생각하면 큰 보람인 것 같네. 베트남역사책도 일독하였네. 베트남에 대한 탐구는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더 계속할 작정이네. 테니스도 가끔 하고, 골프연습장에도 가끔 나가는데 골프는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있네.

큰아이는 2박3일로 붕따우 해변으로 수련회를 떠났고, 둘째는 영어공부에 한창이네. 모두들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열심인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사랑스럽네. 수진이도 열심히 하여 꼭 원하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네.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며...


2000.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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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

잘 지내고 있었는지? 신문에서 메콩강 유역에 큰 홍수가 났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그쪽은 어떠한가?

여기는 이번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네. 동기나 독일팀의 소식은 거의 듣지 못 하고 있네. 그 점에서는 자네보다 별반 나을게 없네. 아무 소식 없으면 잘 있으려니 하고 여기고 있네.


오늘은 아내와 여주에 다녀왔네. 가는 길에 경기도 교육청에 들러 학교 배정 관계도 알아보고, 또 가까운 강천중학교에도 들러 학교 구경도 했네. 다른 생활은 어렴풋하나마 그 윤곽이 그려지는데 학교 문제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느낌이네. 예상했던 것이지만 담당자로부터도 명쾌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네. 며칠 뒤에는 서울시 교육청에도 들러볼 계획이네. 여주 터에 가서는 대추를 실컷 따먹고, 농사 짓는 분한테서는 고구마도 몇 박스 얻어 가지고 왔네. 본래 여주 고구마가 유명하지 않은가. 자네가 가까이 있었으면 한 박스 나누어주고 싶네.


사람 마음이란 마찬가지인 것 같아. 이제 곧 내신 신청이 다가오고 급격한 생활의 변화를 맞이하려고 하니까 비록 원한 일이지만 일말의 불안과 망설여짐은 어찌할 수 없네. 꿈과 자신감만으로 지탱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가족들도 건강히 잘 있겠지? 소주와 삼겹살에 얼굴을 맞대고 여러 얘기를 나누고 싶네.

잘 지내게.


2000. 10. 10. 23:0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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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네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물론 가족들도 건강하고 수진이의 대입준비도 잘 마무리되고 있겠지. 쉽지 않은 고비를 무사히 넘어가기를 기도하겠네. 요즈음 이곳도 가을인지 햇빛 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많이 끼고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네.


오늘은 사이공연합교회에서 안수집사 5분과 권사 2분을 세우는 임직식이 예배 후 있었네. 여기 나의 생활에서 교회생활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4-5명의 구역모임예배가 있고 토요일 저녁에는 성가연습시간이 있고 일요일 예배전과 후 약 1시간씩 성가연습 후 점심을 같이 하고 있네. 시간도 시간이지만 생활 속에서 주님과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아서 많은 위로와 은혜를 누리고 있네.


오는 10월 25일(수)은 한국학교 신축교사 기공식이 있네. 한국측 관계자와 베트남측 관계자가 초청되어 간소하게 있을 예정이고 내년 6월이면 준공하여서 학교를 이전하게 될 것 같네. 남사이공 지역으로서 경관과 환경이 괜찮은 곳이네. 기공식 준비를 학교에서 일부 해야 하므로 많이 신경을 쓰고 있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학교내외 일들이 나의 관여를 필요로 하고 있어서 마음을 쓰고 지내는 중일세. 작을 일이지만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곤혹스럽고 조심스럽곤 하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을 회피할 수도 없고, 책임이 커질수록 결정의 영향력이 클수록 더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여야 하므로 역시 쉽지 않은 일일세.


그곳은 이제 가을이 한창일 것 같은데, 어떤가. 아름다운 가을의 계절을 잘 누리고 있는가. 자네의 메일을 보니 여주행이 거의 굳어지는 것 같은데. 여러 가지로 염려가 많을 줄 아네. 그러나 자네가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오던 일이므로 잘 되지 않겠는가? 생활환경의 변화 혹은 생활 패턴의 변화는 기대와 불안이 함께 동반하는 일 아닌가.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생활의 반복이 되고 안정되게 되리라 생각하네만...

자네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새로운 생활이 주는 변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겠네.


무엇보다도 환절기에 건강에 유의하고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네.


200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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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계절은 벌써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네.

산간 지방에서는 첫서리, 첫얼음, 첫눈 소식도 다 지나가고 이젠 서울도 아침저녁으로는 한 자릿수의 기온으로 떨어졌네. 오늘은 추위를 느낄 정도로 싸늘했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어떤 미지의 힘이 내 등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대고 있는 느낌이네.


아름다운 계절이건만 가을을 보내기가 참 힘드네. 가을 아침의 냉기, 청명한 하늘, 길거리에 깔린 낙엽,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 주는 것 같고 마주 치기가 두려운 그것이 흘낏 모습을 보이거나, 거기서 울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을 때 생활에서는 자꾸 뒷걸음질을 치게 되네.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네. 빨리 가을이 지나갔으면 하네. 자네에게 쓰는 글도 뜸해지고 자꾸 막히기만 하는군. 그나마 다행히도 테니스가 생활의 활력이 되고 있네. 운동에 집중할 때면 정신적 명상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하네. 자네도 거기서 테니스를 한다고 했지? 같이 테니스를 한 지도 참 오래 된 것 같군. 우리 학교에는 골프 연습장도 있어서 많은 선생님들이 골프를 배우고 있네. 회원이 약 30여명 되고 가끔씩 어울려 필드에도 나가더군. 그러나 한국에서 골프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네.


신축 교사 공사는 잘 되고 있는가? 준공 때까지는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겠지. 어떤 일에서도 몸, 마음 상하지 말고 잘 지내도록 하게나.

신앙생활을 통해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네. 신앙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내리라 믿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다음에는 밝은 소식을 보내도록 하겠네.


2000. 10. 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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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가을이어서인지 서로간에 소식이 뜸해진 것 같네. 오늘이 입동이니 절기상으로는 벌써 겨울이 시작되었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오늘은 교실에 난방이 들어왔네. 거리의 은행나무 잎들도 반 이상 떨어지고 코트를 입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모습에서 겨울이 시작된 것을 느끼고 있네.


이제 찬 바람이 부니 조금 생기가 나는 것 같네. 또 하나의 가을을 보내며 거울을 보니 지난 가을의 흔적이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도 같네. 훌쩍 늙어진 모습으로, 내적으로는 더 깊어진 모습으로.


나누고 버리는 아름다움을 대자연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아파하고 배우고 노력하는 그 과정이 또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네. 무엇을 이루려기 보다도 진리의 도상에 서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행복하네. 예수님의 산상 설교중의 한 말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묵상해 보네.


이곳은 갑작스런 기온 변화로 주위에 목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많네. 자네는 도리어 어떠한가? 무변화에 적응하기는 괜찮은가? 특히 이국에서 건강에 조심하길 바라며 다음에 소식 전하겠네.


2000. 11. 8. 20:1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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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지난 달 21일 이래로 거의 한 달 가까이 자네의 메일을 받지 못하고 있네. 메일 송수신 과정에서 무슨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네. 잘 지내고 있는지?


지난 15일에 수능이 있었네. 여러 사람들의 염려 덕분으로 수진이도 좋은 성적이 나와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아이의 확인 결과로는 384점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하는군. 문제가 쉬워 전체적으로 성적이 높아지긴 했지만, 서강대를 목표로 한 아이의 꿈이 이루어질 것 같기도 해 흐뭇하다네.


이곳은 벌써 초겨울 날씨네. 한 해의 마무리를 잘 하길 바라며, 자네 소식을 기다리네.


2000. 11. 1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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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죽었는가? 살았는가?

어찌 이리 연락이 없는가?

첫 눈을 기다리며, 꼭 그만큼 자네 소식도 기다리며....


2000. 11. 23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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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늦어 미안하네.

약 보름만에 메일을 여는데 성공했다네. 신경쓸 일도 많다보니 메일이 한번 안 뜨면 잊은 채로 며칠이 지나가곤 하였네. 자네 이번 메일을 보니 어느새 훌쩍 늙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네. 마음은 아직도 모든 면에서 초보자 또는 신참자 같은데, 세월은 머뭇거려 주질 않는 것 같아. 여러가지로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네. 뭐가 뭔지 잘 모르면서.. 어떤 것이 올바른지 잘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강력하게 추진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자신에 대해서는 한숨만을 남기고 있네.


날씨도 이제 우기(雨期)를 지나 건기(乾期)로 바뀌는 계절이지만 여름임은 분명하네. 학교도 체육대회(운동회)를 무사히 마치고 방학을 한달 앞두고 있네. 오늘은 임시 이사회가 총영사관 회의실에서 있었는데, 학교 건축 관계건과 교사 재임용 관계건등의 의결을 하였다네. 한국 학교는 본국의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중요한 문제는 학교 이사들이 의결하도록 정관에 규정되어 있네. 교장은 당연직 이사이고.. 이사들은 대부분 교민사회의 대표격인 분들로 구성되어있네.


방학은 어떻게 지낼 건가?

겨울을 떠나서 여름으로 한번 여행하여 보게나. 강남의 제비처럼, 겨울을 피해 오는 곳이 이곳 월남이 아닌가.


다음 글은 내가 학교신문의 '교장선생님의 글' 난에 쓴 글일세. 대학 1학년의 감성으로 되돌아가서 써본 걸세.

앞으로 방학까지 한달. 교사 재임용 문제로 어수선한 한달이 될 것 같네. 좋은 소식 전해주기 바라네.


2000. 11. 23(목)


제목 : 아침에...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잠이 깹니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 위로 야자수잎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거립니다. "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그냥 누운채로 움직이지 않고 모처럼의 여유를 느껴봅니다. 「이곳이 어딜까? 물론 베트남이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 꿈일지도 몰라. 내가 지금 베트남에 있다는 것이.. 꿈을 깨면 아마 잠실의 아파트에서 예전처럼 한강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꿈속 일을 생각해 보겠지. 정말 꿈이라면...」

벌떡 일어나 거실을 한바퀴 돌고 조수미CD를 넣고 13번을 선택하고 repeat를 누릅니다. 아마 백 번 정도는 들었을, 아무리 들어도 좋은, 아마도 나를 베트남으로 유혹했을지도 모르는 목소리. 너무 아름다워서 지상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어떨때는 감동으로 까닭 없는 눈물을 고이게 하는 천사의 목소리.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청명(淸明)한 저 하늘로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P군. 해맑은 하얀 얼굴에 연약한 귀공자처럼 보이지만 축구공을 몰며 달릴 때에는 어린 축구황제. 바람처럼 수비수들을 제치며 달릴 때 얼마나 행복할까. 그 화사한 용모와 침착함, 민첩성 등으로 아마 청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꺼야. 멋있는 청년이 되겠지.


자스민 향과 태양이 부르는 고장으로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Mr. V. 수줍어하면서도 공손하고 항상 나와 맑은 눈을 마주하며 인사하는 젊은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을까. 그는 미래에 대하여 어떤 포부를 갖고 있을까. 혹시 하루하루를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의 여자친구와는 어떤 대화를 주고받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모르는 채 지내도 괜찮아.


이 여행자의 비상(飛上)을

나의 시선은 오랫동안 좇았다네

그 후로 꿈꾸는 나의 영혼은

제비와 동행하여 하늘을 난다네

아 신비로운 고장으로


K군의 어머니. K군을 자유 분방하게 키우시는 것 같으나, 그러나 올바른 젊은이로 만들어 나가는 솜씨 좋은 학부모님. 선생님들의 어려운 처지를 열심히 변호해 주시고 복지 문제를 역설하시는 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yes 라고 고개를 끄덕일 때 혼자 no! 라고 고개를 좌우로 저을 줄 아는 멋있는 분. 그래! 참 재미있고 좋은 분이야. 그런 분이 나의 학부모이고 내가 언제든지 대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큰 행복이야. 언젠가 내가 구수하고 따뜻한 베트남커피를 분위기 좋은 shop에서 대접할 수 있을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그리곤 나도 새와 같은 길을 따르고자 했다네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A선생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참 훌륭한 선생님이십니다. 학생이 사랑스러워 어쩔줄 모르시는 분.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한히 행복해하시는 분. 총명한 아이는 총명한대로 키우시고, 부족한 아이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애정으로 지도하시는 분. 감사합니다. 당신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는 아이들은 참 행복한 아이들입니다. 당신과 같은 좋은 교사와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참으로 행복으로 여깁니다.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저 청명(淸明)한 아침하늘로

날개 치며 날아 갔다네

자스민 향과 태양이 부르는 고장으로

제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네.


「프레데릭 반 데르 엘스트」의 시 목가(Villanelle) 중에서


창 밖의 야자수 잎이 시원하게 바람을 일으킵니다. 서유기에서 나오는 우마왕의 부인이 휘둘렀음직한 파초잎들도 세차게 흔들립니다. 아차!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이 너무 흘렀습니다. 아이들을 깨워야 하니까요. 일요일이지만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아침을 먹고 이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지으신 분께 찬양하러 가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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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자네의 아름다운 글과 함께 오랜만의 소식을 반갑게 읽었네. 학교 신문에 썼다는 글이 아주 좋아 몇 번을 보고 또 보았네. 그럴수록 자네의 따뜻한 심성이 전해져 왔네. 사람들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감동적으로 느껴졌다네. 아름다운 시와 그 사이로 배치한 문장들이 기막히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네. 당장 나도 한번 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그저께 술마신 이야기를 아래에다가 적어 보았네.


제비 따라 강남 가기에는 내 날개가 아직 너무 짧은 것 같네. 자네야 말로 이번 방학 때는 서울에 들릴 계획이 없는가? 그리워졌을 서울과 사람들, 그리고 북풍한설의 동장군님을 보러 오게나.


2000. 11. 26. 서울에서


장미상가 지하에 삼겹살 집이 있지. 잠실고등학교 술 좋아하는 선생님들의 퇴근 후 단골집이네. 홀 넓이라야 우리 집 안방 정도밖에 안 되는데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된다네. 어느 때는 들어가지 못해 발길을 돌리기도 하는데, 어깨 부딪치며 왁자지껄, 자욱한 담배 연기, 사람들은 무엇이 좋은지 항시 이 집만 만원이네. 삼겹살이 맛있고 우렁된장찌개가 일미라고 하지만 사람들을 끄는 매력은 다른데 있지. 삼겹살 집과 미스 코리아 대회 경력(?)의 주인 아주머니,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가 있다네. 조금은 냉정해 보이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또 정성스레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집이지. 쇠붙이가 지남철에 끌리듯,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이 미묘한 힘. 학교 선생님 두 분과 이 집에서 오랜만에 소주를 했네. 사양하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 6병쯤 비우고 일어섰을까?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숲 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볼 일을 본다고 간 게 술이 취해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네. 소변기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미즈쯤으로 보이는 여인네가 들어오더군. 아차, 잘못 되었구나 했는데 그분의 말씀이 술을 깨게 만들었어. "할아버지!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예요." 왜 금년 들어서는 유난히 할아버지 소리를 많이 듣는거야?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이젠 화장실에서까지. 가게 유리창 앞에 한참을 서서 보았지. 40대 할아버지의 껍데기가 어떠한가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차는 동경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했지. 안주로는 나의 여주행이 탁자 위에 올랐네. 두 사람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 '패배자' '도피자'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의 화살들이 쉼없이 날아왔네. 차라리 장렬한 전사를 택할 텐데 나도 참지 못하고 독화살을 날려 보냈지. '속물들'이라고. 내가 옳다고, 니가 그르다고 해답 없는 논쟁의 늪에서 허덕였다네. 그래도 서로간에 악의는 없었으니 술 먹은 김에 평소 하지 못한 말들을 내쏟은 셈이지. 마음속에 품은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잖은가.


이빨이 억세며 뭇 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핍하고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L선생님은 마침내 쓰러지는군. 택시 안에서도 정신이 없더니 집 앞에 내려서는 다시 소매를 당기네. 자기 집에 들어가서 술 한 잔 더 하자고. 요사이는 학교 컴퓨터 MP3로 비틀즈를 자주 듣고 있네. 그중에서도 가사 때문에 'Let it be'를 즐기는 편이라네. 술에 취해서 생각나는 노래,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노래.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until tomorrow, Let it be...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술에 취해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고도 서글프군. 자네가 서울을 떠났듯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겠지. 그래도 한강물은 계속 흐를 것이고, 별은 반짝일 것이고, 사람들은 똑 같이 사랑하고 헤어지겠지. 저 세상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에서 걸었던 흔적들은 어떠할까? 장자는 우리 인생을 大夢이라고 표현했지. 인류의 스승들 가운데 한 사람, 그가 가르켜주는 대자유인의 길, 길은 놓아두고 그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 하나가 제 집을 찾아 비틀거리며 가고 있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불경 '숫타니파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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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아름다운 글 잘 읽었네.

깊이 생각하면 이 세상 가는 길 무소처럼 혼자 가야만 하는 길이 아닌가 하네. 글을 보고 자네의 건강이 걱정이 되네. 소주를 6병이나 마시다니..거기에 맥주까지. 우리의 연약한 몸이 어찌 힘들지 않겠나. 우리 나이까지 우리를 지탱해온 귀하고 또 보살펴주어야 할 몸 아닌가. 가끔 운동을 할 때마다 땀이 너무 많이 흘러서 이제 내 몸도 많이 약해졌구나 생각을 자주 한다네. 마음은 젊은이로되 몸의 이미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일상 신경쓸 일이 많아 피곤한데다 이곳 인터넷 사정이 점점 나빠져서 낮에는 메일이 잘 뜨지도 않고 떳다가도 곧 먹통이 되곤 하네. 아마 회선이 작은데 가입자가 너무 많아서 그렇지 않은가 추측하네. 몇번 시도하다 못하고, 또 며칠 지내고.. 하였네. 그런데 새벽에는 잘 된다고 하여서 시도 해보네. 지금은 새벽 4시반인데 이때에는 아주 잘 되고 있네.


수진이의 수능 소식도 나중에사 알았네. 좋은 점수 얻은 것을 축하하네. 그동한 공부하느라 애 많이 썼을 텐데 좋은 음식점이라도 자주 데려가주고, 선물도 많이 사주고 위로해 주게나. 나이가 드니까 아이들이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고 뭔가 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네.


올 겨울에도 서울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 이곳 동남아 인근 국가 여행을 할 까 생각중이네. 방학은 12월 23일이네. 아마 아들 휘중이는 12월 15일 방학하자마자 한국에 가고 싶어해서 보내줄까 하고 있네.


장미상가의 삼겹살집의 포근한 냄새가 여기서도 느껴지네. 정겨운 삶의 모습으로 다가오네. 나중에 자네와 함께 동참할 시간을 예비해두겠네. 단 소주 6병은 무리...


여주행에 대해서는 생각이 일정치 않네. 먼 곳의 풀이 더 푸르러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먼저의 잔디와 다르지 않을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러나 자네가 오래 꿈꾸던 생활인데...

또 소식 전하겠네.


200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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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벌써 12월에 들어섰네. 연말 분위기 속에서 마음도 덩달아 어수선하고 들떠있는 것 같네.

여기는 방학이 21일이네. 이번 방학에는 자네 얼굴을 볼까 했는데 오지 않는다니 서운하네. 그쪽의 더운 열기를 이쪽의 찬 바람으로 좀 식혀보지 그러는가? 우리 동문 모임이 7일에 대학로에서 있는데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네. 오랜만에 동문들 얼굴도 보고 근황도 듣고 싶기도 한데.... 모임들을 알리는 몇 장의 엽서가 책상위에 있지만 사실 기꺼운 마음으로 가고픈 만남은 없네. 그러고 보니 독일팀 모임도 마련해야 겠구만. 이 메일을 보내고 나서 회장님께 연락을 해 봐야겠네.


방학이 되면 책 몇 권 싸들고 고향에 가서 지낼 생각이네. 가끔씩 뒷산에 올라 땔나무를 하고 저녁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넣네. 마른 솔잎으로 불을 지피고, 작고 마른 나ant가지로 불을 살린 다음 굵은 장작을 지펴 놓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볼 만하지. 붉은 불빛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저녁 어스름의 시골 풍경을 상상해 보게나. 따듯한 아랫목에 등을 지지며 문풍지를 약 올리는 겨울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것도 멋지지 않겠는가? 어떤가? 한국의 겨울을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어제 교환 교사 신청을 했네. 그리고 장자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한 대목을 소개하네. 원문도 같이 적고 싶은데 한자 지원이 잘 되지 않는군.

남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기를 비네.


2000. 12. 5. 20:30. 서울에서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기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人能虛己以遊世)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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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의 계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가?

자네의 메일을 보고나서 세모인줄 알았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엽서와 전화, 그리고 한해를 아쉬워하는 자리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인간사회 아닌가. 여러 모임들에 함께하여 사람의 정을 나누어 보게나. 나는, 이곳은 별로 그런 분위기가 없네. 한국에서 이맘때에 듣는 망년회라는 말을 못 들어본 것 같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지기도 했는지, 또는 교회활동을 좀 많이 하다보니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아서 그런지 뭔가 차분하기만 한 분위기일세.

좀 외로운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두주만 있으면 방학일세.

자네의 계획이 부럽네. 그리고 여주행 신청을 했다니 잘 풀리기를 비네. 내 생각에 아주 내려가는것 보다는 한시적 교환교사 근무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어떤가 하네만... 어떤 경우라도 자네의 희망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지기를 기원하겠네.

수진이는 어느 대학을 희망하고 있는가.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가끔 외식도 하면서 좋은 아빠의 사랑도 밖으로 많이 표현해 보게나.

나는 휘중 민중이 어느덧 커버리니까 자기들의 의견이 분명해져서 그저 오냐 오냐 하면서 지내지만, 그러나 낮선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지내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네. 나는 서울에 가지 못하지만 우리 휘중이는 졸업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해서 12월 15일 약 2주정도 서울에 보내려고 하네.


나는 방학동안에도 새 학년도 준비에 마음을 많이 써야 할 것 같네. 이제 학교를 본격적으로 나의 구상대로 조직해야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네. 그동안 느꼈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또 교사 인사문제등 여러가지 일들이 있다네. 시간을 내어서 가족과 함께 이웃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태국을 여행해 볼까 하는데 계획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연말연시의 술자리에 건강 조심하기를 바라고, 자네 가정에 평안과 행복을 비네.


200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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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어제 밤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릴 정도로 요사이 날씨는 포근하네. 학교 테니스장 옆에 개나리도 장난스럽게 망울을 맺고, 때 아닌 나비까지 나타난 것을 보았네. 이런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니까 이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그 원인이 산업 문명에 있다면 우리의 생존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선지 아직 서울 지방에는 첫 눈이 찾아오지 않았네. 그곳은 항시 일정하다지만 요사이 기온은 어느 정도쯤 되는가? 지내기에는 어떠한지?


지난 12일에 수능 발표가 있었는데 수진이가 원점수 384점, 백분율 2.4%에 해당하는 성적을 받았네. 원래는 서강대 영문과를 목표로 했는데 아이가 안전하게 특차 합격을 원해서 좀 하향 지원하여 이대 사회과학부에 원서를 제출했네. 지금 예상으로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지네. 방학이 되면 곧바로 아이를 데리고 동해 바다에 다녀오려고 하네. 바다 옆에서 며칠 푹 잠자고 싶다고 하는군.


자네 말대로 여주 지역에 1년의 교환교사로 신청했네. 정식 전출은 나에게도 부담감이 되는 것은 사실이네. 교육청에 물어보니 내년 2월까지는 이동 여부를 알으켜주지 않는다 하는군. 서울에서 경기도로 신청한 사람은 8명이고, 경기도서 서울로 신청한 사람은 142명이라고 하니 숫자상으로 본다면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네.


휘중이는 서울에 와 있겠군. 본지가 오래되어서 이젠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네. 나도 12월 말까지는 서울에 있을 것 같네.

동기들이랑 여러 사람들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 미안하네. 송년 모임들에 참석하지를 못했네. 독일팀 모임도 성사될 것 같지 않네. 회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사업이 많이 힘들다고 하더군. 최근 한국의 경제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네. IMF때보다 더 어렵다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네. 그러나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으로 날을 지새우고, 위나 아래나 모두들 자기 욕심 차리기에 넋이 나가있고....


건강에 조심하게나. 그리고 학교 일에 너무 매달리지는 말고....


2000. 12. 16. 18:3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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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소식이네.

수진이가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얻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자네가 1년의 교환교사로 신청하였다는 것일세. 자네 가족의 희망이 새해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네. 다시 한 번 축하하네.

이곳의 기온은 일년 중 가장 지내기 좋다는 28도정도 되지 않을까 하네. 추측이네만..

학교일도 국내학교와 같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 이외에도 이곳이 특수한 사회다보니 특수한 일들도 많이 있어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네.


부탁이 한 가지 있네.

첨부로 신규 교사초빙공고를 한국교육신문에 게제할까 하는데, 최대한 속히 게제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네. 필요한 예산은 구좌번호를 알려주면 바로 송금하겠네. 지난번 수학 교사건은 서울고의 좋은 선생님이 오셔서 교민들이 아주 기뻐하고 있다네. 선생님들이 2년 계약이므로 교사초빙문제가 상당히 큰 문제일세. 어려운 부탁드려서 미안하네.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200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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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자네 부탁대로 교육신문에 연락했더니 바로 사람이 찾아오더군. 첨부 파일로 보내준 광고 문안을 전해 주었네. 다음주 26일에 발행되는 신문에 게재된다고 하더군. 내용도 팩스를 통해 한 번 더 확인하기로 했네. 광고료는 100만원인데 21일 오전까지 송금해 달라고 하더군. 과학 교사는 내 주변에서도 한번 찾아보겠네. 한국과 달리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업무가 많은 것 같군.


이곳은 날씨가 흐려지더니 자네가 전화했을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네. 그러나 이틀 뒤면 방학이라는 생각에 절로 즐거워지네. 자네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려 나가길 비네.


2000. 12. 18. 18:0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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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네.

학교교육에서 좋은 교사를 초빙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나 자신도 좋은 교사는 못 되었었지만,

학교를 맡고 보니까 쓸데없는 욕심이 생기네.

자네가 추천해준 사람은 우선 면접하겠네.

교사채용문제는 자네가 좀 도와주게.

우리도 23일 방학하네만 나는 교사초빙문제로 계속 신경을 써야할 것 같고,

그외 학교업무로 편하고 마음대로 지낼수 만은 없을 것 같네.

수진이와 가족과 동해안 잘 그리고 즐겁게 다녀오도록 하게.

가족과 여행할 때는 남자는 그저 여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다녀주는게 최상의 예절인 것같네. 경험에서 나온 철학이니까 참고하게.

1년의 교환교사신청은 참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네.

좋은 경험이 될 걸세. 자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네.

요즈음 구본영이라는 사람이 쓴 '낮선 곳에서의 아침'을 읽고 있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는 삶은 곧 변화이며, 변화가 없는 삶은 죽음이라는 거야.

변화를 이루려면 용기(내부-생명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네.

이곳 도서실에서 책이 많이 있어서 가끔 조금씩 읽고 있다네.

다음에 또 소식 전하겠네.


200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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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오늘 방학을 했네.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내고 남은 텅 빈 교실, 사람 농사꾼으로서 나는 얼마나 충실했는지? 어제는 구의동에 나가 대취했네. 마음을 풀고 한 잔 한 것이 탁자위에 다운될 정도로 정신을 잃었네. 덕분에 오늘은 멍한 가운데 하루를 보내고 있네. 짬뽕으로 속을 풀고, 사우나를 하고, 잠자고....

여주행에 대해 사람들은 왜라고 묻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냐고? 왜 힘든 길을 일부러 가려고 하느냐고? 그러나 대답은 할 수가 없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내적인 욕구, 자네가 책에서 읽었다는 '내부-생명에너지'라는 용어와 흡사하다고 할까? 그 어떤 것이 녹색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는 것을 느끼네. 그러나 눈을 뜨면 주변은 온통 노랑과 붉은 신호등으로 가득하다네.


12월말까지는 서울에 있을 예정이고, 신정은 전주에서 보내고 올라와 바로 고향에 내려가 20일경까지 있을 생각이네. 교사 채용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게나. 작은 힘이나마 보태주고 싶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네.

우리 마음속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빛으로 우리 존재가 충만 되기를....


2000. 12. 21. 19:3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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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성탄 카드 )


성탄을 축하하네.

자네와 가정에 우리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도하네.

염려해준 덕분에 수진이는 무난히 이대에 합격했네.

오늘 가족과 함께 고향에 인사드리러 내려 갈려고 하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길...


200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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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신문 광고에 나온 호치민 한국 학교의 전화번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네. 앞에 001을 붙이지 않으니 서울 가정집이 나오는데 그 집에도 피해를 주는 것 같고, 또 아직 인터넷마저 연결이 잘 안 되어 여러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것 같네. 빨리 인터넷만이라도 복구가 되었으면 싶네.

그리고 추천한 과학 교사는 과거에 전교조 활동을 하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군. 내가 직접 아는 사람도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그쪽 학교에 맞는 적임자를 잘 선발하도록 하게.


가족과 같이 고향에 내려갔다가 White Christmas를 맞았네. 하늘이 눈을 그렇게 아끼더니 이브날 밤에 전국적으로 흰 눈을 내려 주었네. 며칠간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추위가 찾아오더니 오늘부터 다시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네. 추위는 추위대로, 따스함은 따스함대로 자연이 주는 선물은 고맙기만 하네.

방학의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길 바라네.


2000. 12. 28. 10:0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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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초빙문제로 애써주어서 고맙네. 1월 10일경 교사면접관계로 잠시 서울 출장이 있을 듯 싶네.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신문 사진을 보면서 잠시 겨울의 서정에 젖어 보네.


이번 방학은 자네에게 넉넉하고 행복한 방학일듯 싶네. 보람있게 그리고 즐겁게 잘 보내도록 하게. 나는 이번방학이 여러 가지로 바빠서 시간내기가 어렵지만 마음만은 넉넉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네.


재임용이 되지 않은 교사 중 노동운동가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여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고 다녀서 문제일세. 여기저기다 이메일을 보내서 학교 망신을 시키고 있는 모양인데, 역시 좋은 교육은 좋은 교사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네.

요즈음 서울의 교실이나 학교 분위기는 어떤가. 조금 거창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미래와 번영을 생각할 때 우리 교육이 커다란 역할을 하여야 할 것 같은데..


이만 줄이겠네.

우리 넉넉하게 지내도록 하세.


200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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