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비자금과 사람 노릇

샌. 2007. 1. 29. 09:03

얼마 전에 동료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아내 몰래 숨겨둔 돈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소위 비자금이라 부르는 것인데 그 자리에 있었던 남자들 과반이 이런 돈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수백만 원에서 많은 사람은 수천만 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 모르게 때때로 생기는 부수입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요사이는 월급이나 수당 등 모든 급여가 바로 통장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본인에게 직접 들어오는 돈은 없다. 그런데 비자금을 만들려면 경리 직원에게 부탁해 그때그때 생기는 수당을 아내가 모르는 자신만의 통장에 입금시키는 방법을 쓴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까지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비자금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아내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부득이한 용도로 돈을 써야할 때가 생긴다. 주로 형제들, 또는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 비자금 예찬론자인 한 사람의 경험담이었는데 어떤 사건이 벌어져 형으로서 동생을 도와주어야 할 일이 생겼다. 아내에게 말하기에는 거북한 상황이었고, 말한다고 해도 아내가 반대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외면한다면 형제간의 의가 상할 수도 있었다. 그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자금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했다.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상황들이 가끔 닥치기 때문에 사람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나는 비자금의 ‘비’자도 모르며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아내 모르게 돈을 관리할 때 너무 신경이 쓰이게 될 것 같아서 싫다. 물론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거북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마음대로 쓸 돈이 한 푼도 없다. 완전히 유리지갑이어서 필요할 때마다 아내 손을 거쳐서 돈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불편한 것이 부모, 형제 또는 친척간의 관계에서 좀 넉넉하게 베풀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떨 때는 상대편이 야박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럴 때는 내가 쓸 수 있는 비자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을 통해 정이 돈독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용돈을 자주 집어주어야 가까이 오고 잘 따른다. 노인이 될 수록 돈의 위력을 절감할 것이라고 인생 선배들은 충고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자격 미달인 셈이다. 이제는 상대방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들에 대해서 아내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낮은 보수의 월급쟁이 남편의 수입으로 서울 살림을 꾸리자면 무엇 하나 알뜰살뜰 아끼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마음이 이렇다면 아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나름대로 남편 모르게 쓰고 싶은 돈의 필요성을 여자들 또한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사이 맞벌이 부부들은 각자 통장을 관리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떤 면에서는 가정의 비상금으로 아내들이 비자금의 필요성을 더 느낄 것도 같다. 내 아내에게 비자금 통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아야 곧이곧대로 대답할 리가 없으니 확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내도 나처럼 그런 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서로가 눈치를 보면서도 좀 부족하게 살아가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갑이 텅텅 비어있으니 사람 노릇 하기에는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떨 때는 누구처럼 비밀통장에 수백만 원의 돈이 들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한다. 그러면 친구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위로금도 넉넉히 넣어주고, 고향 마을의 형이 세상을 떴을 때 자식들이 고마워할 수 있을 정도의 조의도 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괜히 봉투를 내밀며 송구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람 노릇 해보겠다고 비자금을 조성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거니와 내 체질에 맞지도 않는다. 비자금이 필요하다는 동료들의 말에는 공감하지만 나는 내 생긴 대로 살 뿐이다. 비록 사람 노릇에는 부족하지만 그게 훨씬 더 마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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