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설야 / 김광균

샌. 2007. 1. 27. 08:19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여위어가며서글픈 옛 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설야(雪夜) / 김광균

 

 

 

이 시도 나의 애송시 가운데 하나다. 특히 언어적 리듬감이 살아있어 낭송하기에 좋다. 한 번 외우기 시작하면 부드러운 파도를 타는 듯 자연스레 술술 연결된다. 마지막 연의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는 음악적 리듬감의 극치이다.

 

 

시의 주조는 그리움과 슬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흰눈이라는 이미지에 의해 그것은 순결하고 정화된 감정으로 변한다. 천박하거나 속기(俗氣)가 없는 맑디맑은 그리움과 슬픔이다. 눈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듣는 절절한 그리움이지만 그것은 흰눈만큼 맑고 깨끗하다.

 

 

 

밤에 누워 있으면 밖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쥐가나무를 갉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 조심스럽게 마당을 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살며시 방문을 열어보면 아, 눈이사각사각 내리고 있다. 그때 어린 시절 이후 도시로 온 나그네는 눈 내리는 소리를 잊은지도 오래 되었다.

 

 

 

'설야'는 겨울 정취에 가장 어울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몇 구절 읊어보는 것 만으로도 눈 내리는 겨울밤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백락천이 지은 같은 이름의 한시도 함께 감상해 본다.

 

 

 

已아衾枕冷

復見窓戶明

夜深知雪重

時聞折竹聲

 

 

 

이부자리 차가움을 이상히 여겨

다시 바라보니 창이 환하네

깊은 밤 많이 내린 눈을 아는 건

이따금 부러지는 대나무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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