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2006 노벨 평화상 - 그라민 은행

샌. 2006. 10. 16. 13:13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였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라민(Grameen) 은행의 창립자인 유누스(M. Yunus)의 말이다.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을 통해 ‘가난 없는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해 고민하는 나라가 있고, 한 쪽에서는 먹을 게 없어 하루에도 수만 명씩 굶어죽어 가는 이 비극적 현실에서 그라민 은행은 가난 퇴치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전혀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방법이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76년 치타공 대학 교수 유누스가 마을 주민 42명에게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된 ‘무담보 소액대출(micro credit)'이라는 이 프로그램은 자립의지가 있는 극빈층을 대상으로 창업 지원을 해주는 빈민구제 제도이다. 1983년에 그라민 은행으로 발전하고 20여년이 지난 현재 전국 1,175개 지점을 두고 직원수만 1만 2천여명의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2050년 전세계에서 가난을 완전히 추방하자'는 기치를 내건 그라민 은행의 목표는 총칼을 들지 않은 아름다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은행들은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빈민들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담보 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영원히 풀 수 없는 가난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누스는 은행을 비롯한 제도권의 냉대를 보면서 가난한 이들이 받는 고통이 물질적인 것에만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굶주리거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불결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더 끔찍한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가하는 부당한 편견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돈을 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다, 절대 갚지도 않는다는 근거 없는 편견들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그들을 옭아맨다.

‘소액신용융자’라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그는 지금 방글라데시의 빈민 240만명을 가난에서 구출해냈다. 그들이 빌려간 돈의 상환률은 98%에 육박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에 불을 붙이기만 한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이런 기적 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상적인 발상과 함께 현실적으로 정밀하게 짜여진 시스템이 병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먼저 진정한 자활의지를 갖추고 있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시험 등의 복잡한 절차를 통해 까다롭고 신중하게 대출자를 선택한다.

대출 신청은 반드시 5명의 그룹이어야 가능하다. 혼자일 때 부족할지 모르는 추진력이 보완되고, 그룹 멤버들 사이에 생기는 연대의식과 은근한 경쟁심이 창업을 성공시키는 중요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별한 대출자들에게 금융지원과 함께 교육도 함께 제공한다.

은행이 고객들을 직접 찾아가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잘 훈련받은 은행원들이 대출자들을 찾아가 삶의 질 향상과 창업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은행 직원들은 개별 고객들과의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라민 은행의 상환원칙은 엄격하다. 일주일에 한번씩 1년 동안의 소액 분할 상환을 원칙으로 하는데, 반드시 이자와 원금이 함께 상환되어야 하며, 아주 조금씩이라도 상환이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한 지역의 지점 안에서 한 사람이 신용이 나쁘면 다른 대출자들의 대출한도에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신용을 담보하게 된다.

이 체계적인 시스템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열정으로 유지 발전되는 구조이다. 대출자들은 물질이 아닌 '자활의지'를 담보로 보여주고, 은행은 그들의 의지만을 보고 그들을 '신뢰'하여 돈을 빌려주고 지원해 준다. 교육 과정에서 은행과 대출자간의 신뢰감, 같은 그룹의 대출자들 간에 형성하는 '연대의식'과 '추진력'은 창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주요 키워드이다.

"우리는 다른 은행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정반대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들로 유지되는 그라민 은행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가난할수록 돈 빌리기 쉬운 은행. 담보가 없이 돈을 빌릴 수 있는 은행. '물질'과 '결과' 보다는 '인간'과 '과정'을 중시하는 은행.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우리가 비현실적이라고 체념해 버리는 이상도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라민 은행은 시장경제원리에만 맡겨 가난을 영구화시키는 우파의 시장 경제 프로그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면서, 극빈자들을 단순히 생존하게만 만드는 좌파의 복지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판의 시선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 방식과 사회주의 목표가 혼합된 이 방식을 유누스 총재는 '민중적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이 새로운 방식은 좌파로부터는 미국의 사주를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싹을 심으려 하는 음모집단이라고 비난받고, 우익 성향의 이슬람 보수주의자들로부터는 방글라데시 고유의 전통과 종교를 말살한다고 비난받는다. 그리고 극빈자들에 대한 단순한 원조를 반대하는데, 무조건적인 보조금은 지원받는 대상을 오히려 정신적 노예 상태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상당수의 실업자금이 교육부문에 투입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실제 대부분의 교육이 보기 좋은 교육에만 치우쳐 교육대상이 자신감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의지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사례는 나라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가난을 지구상에서 퇴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충분히 현실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꿈꾸어 온 이상들이 현실 앞에서 무수히 좌절되는 경험을 해 왔기에 그라민 은행의 경우는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라민 은행이 방글라데시가 아닌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각 나라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 꿈을 이루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올해의 노벨 평화상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상에 돌아간 것 같아 흐뭇하기만 하다. 그라민 은행이 이루어낸 결과만이 아니라 그 지향하는 가치나 방법은 모든 사회 개혁가들과 이상주의자들에게 본보기와 희망이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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