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빈 들

샌. 2005. 11. 14. 15:44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의 빈 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쓸쓸합니다. 논과 밭의 결실을 끝냈는데도 농촌에는 무기력과 한숨만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만나는 농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농업 정책이 세계화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다고도 하고, 이 방법이 농민을 위하는 유일한 거라면서 나라 살림 맡은 이들은 달래지만 살림살이는 해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갑니다. 몸이 부서져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점점 멀어집니다. 농사에 뜻을 두고 투자를 한 사람이라면 빚만 늘어나기 십상입니다. 농민들은 이것을 농업을 포기한 농정 정책 탓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반도체를 수출하는 대가로 농민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려움을 당하는 계층이 농민만은 아니지만 힘이 없고 조직이 없다고 홀대를 당하는 농민들은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쌀을 불태우거나 농기구를 들고 나오는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11일은 농업인의 날이었는데 암담한 농업의 현실에 절망하며 한 30대 농민이 자살을 했습니다. 빼빼로만도 못한 농업인의 날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잘난 언론에서도 농촌의 현실에는 눈을 감아버립니다.

세상은 이미 자살이나 투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농촌만 문을 닫고 독야청청할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국회 비준안이 몇 년 연기된다고, 수치가 몇 %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무한경쟁의 체제 안에서 농업도 막무가내로 내몰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결국 경쟁력 있는 소수의 전문 농업경영인의 손에 농업은 집중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소농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아니면 농촌 빈민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폐기 처분된 슬픈 옛 구호입니다. 우리 모두가 농민의 후손들이지만 농업의 종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 쓸쓸한 빈 들을 바라보니 농촌의 현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농촌의 문제만이 아니라 도시는 도시대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부자가 되어간다는데 사람들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하고 야박해져 갑니다. 도시 농촌 구별 없이 대부분이 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는데도 모두들 태연작약입니다. 그래서 저 황량한 들판은 바로 우리들 마음으로 보입니다.


저는 농촌 문제만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지 말고 나라의 기본 생존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업정책은 소규모 자작농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합니다. 다른 분야를 좀 희생하더라도 과감한 농업 육성 지원책이 필요합니다. 농촌 인구는 지금보다 더 늘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질적인 연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도시인들이 저절로 농촌을 찾아갈 마음이 생기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여기엔 당연히 농민들의 의식 전환도 뒤따라야겠지요. 농민들은 땅과 생명을 돌본다는 생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작은 것에 만족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농민들은 돈이 아니라 인간과 나라의 기본 가치에 대해서 주장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 세계화 체제 안에서도 농업의 회생 방안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 이익집단 사이에 마찰이 있겠지만 농업의 중요성을 서로가 인식한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시골의 논과 밭에는 공장이 들어서든가 잡초로 뒤덮이고, 몇 푼 더 값이 싼 외국산 농산물이 우리 식탁을 점령해 버리는 사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현상들이 SF에서 그리고 있는, 미래에는 인간이 밥 대신에 알약 하나만 먹으면 되는 세상의 전조곡이나 아닌지 하는 두려움도 듭니다. 그렇다면 농업의 종말은 필연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 죽음을 관찰하고 있는 세대인 셈입니다. 인간 진화가 이런 식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사람이 기계 인간화되는 이런 변화에는 왠지 저항하고 싶습니다. 저는 차가운 발전보다는 차라리 따스한 정체를 택하고 싶습니다.


제가 자랐던 60년대의 농촌을 생각하면 가난한 시대였는데도 지금과 같은 박탈감이나 빈곤감은 적었다고 기억됩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수확이 있는 풍요의 계절이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한 나절이면 해치울 벼 베는 일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며칠을 해야 했습니다. 그 뒤로 볏단을 집으로 나릅니다. 지게에 지고 또는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마당으로 나르는데 눈을 감으면 나락을 한 구루마 가득 싣고 마당으로 들어오던 우리 집 황소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밤늦게까지 나락가래를 쌓습니다. 아침이면 항아리같이 생긴 나락가래가 마당이 좁아라 생겨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물론 많은 인력이 소요되는 고단한 일이었겠지만, 사람의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만족감에 기여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기계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단축되고 단순화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논에 기계 한 번 지나가면 해결이 되어 버립니다. 돈이 농민의 근원적 욕구 충족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다고 경쟁력이 높아져 실질 소득이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농촌 문제는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합니다. 그렇다고 가위로 뭉턱 잘라버릴 수도 없습니다. 또 누가 누구를 비난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따스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침 고정희 시인의 ‘쓸쓸함이 따뜻함에게’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누가 따뜻한 세상으로 가는 그 길을 가르쳐주실 분은 안계신가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따뜻한 세상하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물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 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취 오가피 다래눈

저너귀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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