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항복

샌. 2005. 6. 22. 17:10

풀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터를 장만하고 작물을 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농약은 사용하지 말자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제초제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통제를 최소로 하면서 작물을 가꿔보고도 싶었지만 시골 마을 한가운데서 그렇게 했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일 테니 그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깔끔한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시골에서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합니다.

화단만 하더라도 적당히 풀과 어우러져서 꽃들이 피어있는 쪽이 저에게는 훨씬 더 보기에 편합니다. 이것도 풀이 적당히 나 있을 때 얘기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방심하면 풀은 온 터를 점령해 버립니다. 비라도 한 번 와버리면 보약을 받아 마신 양 풀 세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 눈에도 거슬리는 것은 어떡할 수 없습니다.

특히 아내나 동네 사람들은 풀이 무성한 것을 봐주지 못합니다. 아내는 풀과의 전쟁에는 무척 호전적입니다. 그러나 막강한 적 앞에서 잠시의 승리만 누릴 뿐 풀들의 생명력을 무기로 한 인해전술 앞에서는 늘 무릎을 꿇습니다.

터에 나는 풀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씀바귀입니다. 흰 꽃이 좋아서 귀퉁이에 심어본 것이 화근이었는지 지금은 이 놈의 번식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바람에 날린 씨들이 퍼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그냥 둔다면 온 터가 씀바귀 밭으로 변할 것 같습니다.

호미를 들고 쪼그려 앉아 풀을 뽑는 우리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답답하다고 혀를 찹니다. 제초제 한 번 쫙 뿌리면 되는데 저 고생을 한다고 속으로는 미련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터에 내려가서 제일 많이 시간을 뺏기는 작업이 풀 뽑기 입니다. 그래도 그동안은 잘 버텨 왔습니다.

산의 흙을 파다가 복토를 한 터라 처음에는 풀이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 해는 차라리 편했던 셈이지요.

그러나 해가 지나면서 돋아나는 풀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올해는 우리의 육체노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제초제를 쓸 생각까지는 차마 들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풀에 특별히 민감합니다. 지저분한 꼴을 봐주지 못합니다. 풀 때문에 둘은 자주 티격태격 합니다. 나는 되는 대로 지내자는 주장이고, 아내는 제초제라도 뿌려서 깨끗하게 만들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판 크게 붙었습니다. 서로 큰 소리가 나오고, 드디어 아내는 터에 내려오지 못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저도 성질이 많이 났습니다.

이웃 분들도 왜 제초제를 뿌리지 않느냐고 거듭니다. 터의 풀에서 날아간 씨들이 이웃집에도 피해를 준다고 은근히 협박합니다.


그 길로 차를 몰고 읍내에 나가서 제초제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온 터에 풀이 난 곳이면 모두 생화학 공격을 했습니다. 제초제를 뿌리더라도 작물 근처에는 조심하려고 했는데 이왕 버린 몸 하면서 못 본 척 융단폭격을 해 버린 것입니다.

미안한지 표현은 안 하지만 아내는 대체로 만족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몹시 쓰렸습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듯 허전했습니다.


농약사 주인이 이 제초제는 친환경성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제초제에 친환경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그래도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하여튼 제초제라고 하면 고엽제가 떠올라서 영 불쾌하기만 합니다.

사람에게 주는 나쁜 영향도 그렇지만, 흙 한 줌 속에는 미생물 수 억 마리가 살고 있다는데 그런 생명들이 다 몰살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못 할 짓을 했다 싶습니다.

고작 내 눈과 몸의 편의를 위해 한 행동 치고는 다른 희생이 너무 크고, 화가 난다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나 아닌지 무척 후회가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를 해보지만 그때뿐입니다.


이번 주말에 내려가면 살육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에 만족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현장이 참혹해서 이젠 다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생각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초제를 뿌리고 나서 요 며칠간 계속 마음은 뒤숭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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