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샌. 2005. 5. 27. 18:00

악마가 말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뻐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일이 없다.”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일도 없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악마는 소유물을 기뻐했지만, 붓다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부정했다.

낙관적 세계관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며 우리 사회는 그런 가치관을 지향하도록 가르친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정신병자 보듯이 하기도 한다. 마시던 술병을 보며 “아직 반이나 남아있군”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반밖에 남아있지 않군”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그런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물을 비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더 넓게, 참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으로써 비관적이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른다.

붓다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붓다는 일체를 고(苦)라고 선언하고 거기서 해방의 복음을 전했다. 붓다에게서 비관은 비관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진실을 전하는 거울이었다.

사람들은 사물의 어두운 측면과 마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낙관주의가 그런 어두움의 회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낙관도 비관만큼 위험한 것이다.

낙관이 찬양받는 것은 세상의 고(苦)와 어두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거기에 잠겨든 다음에 피어나는 긍정의 꽃이 될 때뿐이다.


청년 시절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

지금은 책의 내용이 희미해졌지만 당시의 나에게 이 책은 염세주의 철학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르쳐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단순하고 경박한 것을 경멸하고, 깊고 진중한 것을 사랑하던 시기였다. 이 책을 통해 진지한 비관이 경박한 낙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배웠다.


위의 예화에 나온 악마의 기쁨과 붓다의 근심을 비교해 본다.

기쁨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온 바탕에 따라서 말 그대로 악마의 기쁨이라고 부를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만족하는 기쁨이며, 단순하고 멍청한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어찌되든 나 하나 일신의 안녕과 행복만 지켜지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런 낙관이 사람을 성숙시키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관은 세상과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고, 내적 변화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비관은 세상을 진정한 눈으로 보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붓다의 근심은 지혜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붓다의 미소에는 그런 모든 것이 녹아있는 것 같다.


요사이 많이 느끼는 것이 그런 비관의 가치이다.

비관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사물을 더 깊고 진지하게 보려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쉼 없이 묻고 부정하는 자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 세상에서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행복하다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자격이나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

나는 철없는 낙관주의자가 되기보다는 비록 번민에 시달리더라도 진지한 비관주의자가 되고 싶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바라는 세상  (3) 2005.06.18
[펌]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0) 2005.06.11
철새는 날아가고  (0) 2005.05.21
한 장의 사진(2)  (0) 2005.05.14
비 오는 날의 공상  (0) 200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