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샌. 2005. 6. 11. 10:12

차일피일하다간 모종 심을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재래시장에서 고구마와 고추 모종을 구했다. 마사토의 표면을 띠고 있었으나 밭에 손을 대는 순간, 땅 속에는 엄청난 돌이 박혀 있었다. 각오한 일이지만, 벌써 땡볕에 사흘째 엎드려 돌을 골라내도 끝이 안 보인다. 큰 돌은 작은 돌들을 뿌리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돌밭에서 곡괭이질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호미로 먼저 잔돌을 골라낸 뒤, 곡괭이질을 해야 큰 돌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을 캐면서 최근 유례없는 감탄과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국보급 과학자’ 황우석 교수 생각이 났다. 왜 그가 떠올랐을까. 내색을 자제했지만 영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혹은 그쪽 세계와 돌을 골라내고 고구마와 고추를 심으려는 내 돌밭의 현실과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 얼마나 촘촘하게 박혀 있었는지 캐내다 보니, 캐낸 자리와 캐낼 자리의 경계가 거의 고고학자가 선사유적을 발굴하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일부 운동선수를 제외하고 도대체 한 인물에 대해 이토록 온 국민이 열광적으로 찬사를 바치고, 기대하고, 흥분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온통 나라는 이 ‘국민과학자’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요인으로서 경호를 붙이고, 줄기세포 은행설립과 도메인을 장악하고, 특허를 맡을 전문가팀을 신설하고, 몇 십억원 되는 특허비도 국가가 대야 한다는 소리마저 들린다. 돈은 얼마든지 댈 테니 마음 놓고 연구를 하라는 분위기다. ‘이제 권력이 자본의 힘으로 넘어갔다’고 서슴없이 술회하는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은 투자로 얻은 나라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거나 그의 연구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생명공학의 선진국임이 증명되었고, 그로 인해 부수될 여러 이익들을 철저히 챙기려는 게 정부의 의지로 읽힌다. 언론은 연일 그를 특집으로 다루고, 그의 줄기세포 연구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와 넘어야 할 난제들을 양념처럼 짚기는 하되, 그를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찬사도 다양해서 ‘산업혁명에 비견될 과학혁명이다’라는 극찬에서부터 뉴턴, 아인슈타인, 세종대왕, 나중에는 이순신에까지 비유된다. 미니 무균돼지 체세포를 은밀하게 반입한 일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문익점과 동일시한 것은 현란한 수사를 잘 구사하는 본인의 비유였다.


사람이 송아지를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만들

기술로 발전할 수 있는 일에

국가가 열광하는 건 문제

고구마 심은데 고구마 나고

고추 심은데 고추 나는

세상이 건강한 세상

 

선량한 국민감정은 차기 노벨상은 그가 받아야 옳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나라의 원로를 비롯해 국민들 모두 그를 유감없이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과학한국의 위상제고와 무엇보다 이 연구가 난치병 치유로 이어지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난치병 환자들의 고통을 짐작한다면 그에 대한 기대와 숭배에 가까운 감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행여 이 흥분의 시기에 혹 생명공학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그의 연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신경한 흉측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구결과가 의학에 선용되자면, 숱한 난관을 거쳐야 한다고 들린다. 당장은 줄기세포의 어떤 부분이 특정 세포로 분화하는지 모르는 상태이고, 분화속도를 늦추지 못하면 암세포가 되는데, 거기까진 속수무책인 상태라고 한다. 설사 분화속도를 늦췄다한들 다른 문제는 돌출하지 않을까. 모든 문제는 언제나 과학과 기술로 극복될 것인가. 그래서일까. 황교수 자신도 환자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과 “그 시기는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말을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같이 구사하고 있다.

 

난치병 환자 치유가 연구의 목적이라 내세우지만 그것은 인도주의를 표방한 부차적인 소득일 뿐,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명공학에 공을 들이는 데에는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한국은 왜 황교수를 배출하게 되었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반대여론이 약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외신은 전한다. 이것은 칭찬인가, 야유인가. 기술 선점에 대한 분통함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국사회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하다는 야유로 들린다.

 

한 여성으로부터 지나치게 얻어내는 인위적인 난자 확보와 버려지는 난자와 배아 문제는 생명윤리 차원에서 여전히 딜레마다. 그러나 황교수는 “윤리문제는 정답이 없다”고 말하면서 “생명공학의 대세를 막으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다”고 단언한다. 아마 맞는 말일 게다. 손으로 밭의 돌이나 캘 수 있지 어떻게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대세의 흐름이 아무리 그렇다손 쳐도 황교수의 연구연보에 드러나 있는 바, 왜 사람이 송아지를 ‘생산’하고, 젖소를 ‘생산’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도저히 떨치기 힘들다. 이 의문은 과연 생뚱맞은 의문일까. 송아지는 어미소가 낳고, 망아지는 말이 낳고, 사람은 사랑의 결과로 태어나야 옳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생명공학보다 훨씬 정교하고 월등한 ‘자연의 기술’이 아니겠는가. 난치병 극복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동선을 방패처럼 내걸고 있지만, 만약 이 복제기술이 당사자들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진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농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농업생명공학은 이미 실패라는 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사람이 송아지를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발전할 수 있는 일에 국가가 이토록 아무런 의혹 없이 열광한다면 이는 결코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산천의 파괴는 합법적으로 가속화되고 있고, 믿지 못할 먹을거리가 밥상에 오르고 있고, 원인 모를 피부병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나는 내가 낸 보잘 것 없는 세금이 예측 못할 생명공학의 발전에 쓰이기보다는 난치병 환자가 속출하지 않을 건강한 사회에 쓰여지기를 원한다. 고구마 모종을 심으면 고구마가 나고, 고추 모종을 심으면 고추가 자라는 세상이 건강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무섭다. 세상의 이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 한겨레신문(6/9), 최성각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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