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9년 가을, 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가을 운동회는 거창하게 치렀다.
아마 그 때 포크댄스가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그 해 운동회 때는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포크댄스 경연을 했다.
뻣뻣한 남학생들이 포크댄스를 배우느라고 오후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처음 접해보는 부드러운 리듬과 몸동작을 따라가지 못해 연신 웃음보를 터뜨리던 기억도 난다.
옆에 있는 여학교에서 파트너를 초대하자고 학교 측에 건의를 했지만 결국은 우리들 절반이 여장을 하고 대회를 열었다. 키 작고 곱상하게 생긴 아이들이 여자 파트너 역을 맡았다. 나는 친구의 누나 옷을 빌려서 입었는데 진짜 여자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때도 입시 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중학교부터 입시를 보고 들어갔으니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도 더 입시 전쟁을 치른 셈이다.
당시는 학교 선생님들도 자유롭게 과외를 할 수 있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담임선생님 집을 찾아가서 과외 수업을 받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모르겠으나 당시에 시골에서는 선생님들이 밤에까지도 거의 무보수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가르쳐도 문제시되지 않았고, 도리어 고맙게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궁핍했던 그때가 도리어 마음의 여유는 더 있었지 않았나 싶다. 돈과 출세에 대해서 지금처럼 안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지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가을 운동회 준비를 하며 수업을 빼먹으며 연습을 한다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 몰상식한 시도를 할 학교도 없겠지만 말이다.
또 한 번은 전국 체육대회 합창단으로 한 학년이 차출이 되어 나가기도 했다. 방과 후에 합창 연습을 하느라고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숙명여고와 혼성 합창단을 이루었는데 같이 효창운동장에 모여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니 많은 시간을 빼앗겼을 것이다.
물론 불평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공부와 개인적 영달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삭막한 인문계 교실에서 그런 활동들이 하나의 숨통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학기가 시작되고 두 달 사이에 벌써 10여 명의 중고생이 성적 때문에 자살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린다. 특히 성적 우수 학생들의 중압감이 더 심한 것 같다.
아이들의 유약함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 사회가 지향하며 아이들에게 은연중 주입하는 가치관이 올바른 것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인성 교육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지(智), 덕(德), 체(體) 중 덕과 체는 폐기 처분되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어른들이 말과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과거를 바라보는 내 눈이 편견일 수도 있다. 선택적 기억에 의해서 과거는 아름다운 것만 기억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옛 시절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가치가 보편적으로 존재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아니었나 싶다.
신문기자였던 노학자 한 분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동료들과 술을 코가 빠지게 마시고 출근을 못하면 옆의 동료들이 걱정을 하며 자신이 할 일을 서로 나서서 대신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옆의 동료가 결근을 해도 자기 일에 바빠서 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서로간의 경쟁의식도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사람들은 술을 마셔도 내일 일을 생각해 적당한 선에서 그치고 만다며 허허 웃으셨다.
지금 사회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엄청나게 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정, 사랑, 돌봐줌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윤활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삭막해진다. 단순하게 과거와 현대의 가정을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저 옛날 사진을 보며 빈한했지만 그래도 인간 사이에는 정이 흘렀고, 낭만이 있었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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