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앞 보도에서 '나무, 그 품에 안기다'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환경재단과 그린페스티발이 주관해서 매년 열고 있는 환경사진전인데, 올해는 나무와 숲을 주제로 해서 세계의 사진 작가 16명이 참여하여 84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자연의 소중함, 안타까움, 또 생명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인상 깊은 사진들이 많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작품을 모아 보다.
[미국 뉴욕시 점심시간 / Thomas Hoepker]
한 남자가 발가벗은 채 바닥에 누워 있다. 빨리 점심을 먹어치우고 다시 숨가쁘게 일에 매달려야 할 텐데, 남자는 바쁜 세상을 잠시 접어두고 한가롭게 오후의 휴식에 빠져 있다. 나무와 남자가 이 거대한 문명의 도시에서 알몸으로 마주한다. 서로간에 대화는 없지만, 미풍의 달콤함을 맛보는 것으로써 두 존재는 소통한다.
[1996 고성산불 / 김선규]
산자락을 물들이며 넘어가는 붉은 노을은 아름답다. 하지만 산을 집어삼키는 화마의 붉은 색채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 결과로 생긴 벌거숭이 산이 그저 보기에만 안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 해 여름 인근 마을 사람들은 임목이 모두 소실되는 바람에, 행여 산사태라도 나지 않을까 애간장이 탔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에게도 고통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알래스카 세인트 엘리아스 국립공원 / Frans Lanting]
1억3천만 에이커의 드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엘리아스 국립공원에는 지층이 충돌하면서 솟아오른 산맥들과 빙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또한 이곳에는 솔송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로 이루어진 아한대수림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광활하고 적막한 풍경 속에 서있는 나무들은 때때로 고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독의 색깔은 외로움이 아니라, 태초의 순수함이다.
[그리스 정교회의 의식 / Abbas]
120km라는 기나긴 노정을 거쳐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한 그루의 나무일 뿐이다. 하지만 지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순례자들이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하고 나면 사람들의 영혼은 한결 투명해질 것이다. 그리스 정교회의 순례 여정에 속해 있는 이 통과제의는 나무가 나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울타리 안의 토끼 사육장 / Pascal Maitre]
니제르의 북부 사막지대에서는 주로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70년대 가뭄을 겪으며 가축의 50%를 잃게 돼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과잉 방목을 한 결과 목축지가 많이 고갈돼 있는 상태다. 푸른 나무와 풀이 자라나고 있는 사육장이 토끼에게는 축복받은 '드넓은' 공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일 것이다.
[하와이 마우이섬 / Sean Keman]
하와이 전설에 의하면 마우이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인 존재로, 인간을 위해 원래 하나였던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태양의 궤도를 바꿨다. 그 전설의 섬 마우이에서 나무는 또 다른 '마우이'가 된다. 온몸을 흔들며 어딘가로 가기 위해 몰아에 빠져있는 나무, 접신의 경지에 빠진 이 나무는 그 신들림의 절정에서 그대로 멈춰선 것 같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 Sean Keman]
나무가 땅을 향해 몸을 굽히는 것은 세상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다. 낮게 낮게 엎드려,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태초의 속삼임에 귀를 기울이는 나무들,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금단의 땅, 용들이 지키는 신성한 숲에 들어선 듯 나무들은 외경과 공포의 감정을 동시에 일으킨다. 영겁의 시간을 지난 듯 나무의 수피는 메마를대로 메말랐다. 그러나 고행 속에서 영성을 얻으려는 수행자처럼, 고통이 짙어질수록 나무의 영묘함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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