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개신교계의 지도적 목회자들이 모여서 참회 기도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날 여의도에 있는 한 대형 교회의 목사는 이런 내용의 고백과 다짐을 했다고 한다.
"47년 목회 활동을 했다. 목회 활동을 하면서 70에 이르니 회한이 많다. 그동안 값싼 은혜를 가지고 살아왔다. 옳은 것을 옳다 말 못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지적 못하며 사회악에 침묵했다.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자연과 우주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를 들었지만, 나는 사람만 사랑했다. 지금이라도 사회악을 교정하고, 진실된 은혜를 실천하며 살아가겠다."
원로 목사님의 이런 모습은 아름답고 신선하다. 이런 일을통해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는 참회가 행동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의구심도 든다. 그동안 말이 모자라고 부족해서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분의 말씀 중에 눈에 띄는 것이 '값싼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적시해 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은혜라는 말은 신자들에게서 이젠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어 별로 은혜스럽지도 않은 상투적인 말이 되어 버렸다. 기분이 좋아지고 감정이 조금 올라가든지, 아니면 세상일이 잘 돌아가면 그걸 '은혜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은혜라는 말이 너무나 값싸게 사용되고 있다.
값싼 은혜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만족을 먼저 찾는 행위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갈구하면서 자신은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이웃은 어찌되든 자신의 안락만을 보장받으려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고 생활과 분리된 믿음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분이 간 길을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단순 논리가 값싼 은혜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값싸게 복음을 팔아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강조가 우리 주위에서 자주 만나는 단순 무식한 기독교인을 양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교리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인격의 변화 없는 또는 생활의 변화 없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비그리스도인의 삶과별로 다르지 않다면 그 믿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면서 자신은 예수 믿어서 은혜 받고 구원 받았다고, 그래서 죽으면 천당 갈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제 경향신문에는 대광고의 전 교목실장이었던어느 분의 얘기가 실렸다. 그 분은학내 종교자유를 위해 농성했던 강의석 군에 동조했다가 사표를 내고,또 목사직도 반납하고 지금은 노점상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강의석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불로소득을 거부하자는 운동을 벌여왔다고 한다.
"3년 전인가, 강남 아파트 값이 엄청나게 뛰었어요. 전세 사는 사람들이 자살하고 그랬죠. 그런데도 부자 동네 교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성도들에게 '아파트 투기하지 맙시다'라고 한 마디만 해줘도 분명 뭔가 달라질 텐데."
기독교인들 만이라도 부동산 투기에 참여하거나 즉물적(卽物的)인세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맑고 깨끗해질 것이다.
사 둔 아파트 값이 급등했다고 미사를 마치고 나오며 '아싸'하고 환호를 지르던 어느 신자의 환호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윤리 불감증을 치유해 주는 강단의 목소리는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
'값싼 은혜'는현대 종교의 문제점을 나타내기 위해 본회퍼에 의해 처음쓰여진 개념이라고 한다.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침묵하는 교회를 비판하며 자신은 히틀러 제거 운동에 가담했다가 순교를 한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그의 글 중에서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대비해 설명한 부분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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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은혜’이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워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값싼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팔려 나간다는 의미이다. 침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었으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 회개하라는 호소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떠한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대가가 치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결코 헐값이 아니었다. 은혜를 위해서 무한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지불되었다.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은혜를 매우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과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이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솟아나올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된다.
만일 은혜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이 올바른 진리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은혜가 값싼 은혜라면, 인생살이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맞추어서 살아도 된다고 설교해야 한다. 정말 은혜가 값싼 것이라면, 우리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값싼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대는 값싼 은혜 아래에서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척 할 필요도 없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나, 한번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교인에게 재침례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불필요한 이설이다. 그대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죄 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을 버려라. 은혜가 항상 그대에게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한, 그대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주고 있으므로, 그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그대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부흥과 개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태여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을 하거나, 조금 다른 길을 가는 척 하지 말라.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그대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극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를 세상과 구별 짓기 위해서 세상을 전적으로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베풀어진 은혜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값싼 은혜를 믿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대가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그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라.
하나님의 피 묻은 은혜를 위해서 살기 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하였으므로,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 속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만들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그분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라.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닌가?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를 가리켜서 값싼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죄인에게도 은혜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가르치는 것이 값싼 은혜라는 가르침의 핵심 논리가 아닌가?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의 올가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기만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경건하고 은혜롭게 변화시킬 수 없으며, 마음속에 죄와 이기심을 붙잡고 있는 죄인들 위에 흰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는 허무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값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의를 부여하게 하는 자기 기만이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각종 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이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 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행습의 개혁 없이도 침례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은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을 진정으로 사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눈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아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값비싼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받기 위해서 희생과 극기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누가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하는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하는 열리는 문이다.
이와 같이 진짜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극기와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오해와 희생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 지울 수 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또한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에 진짜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치루신 값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온 우주의 왕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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