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네 살짜리 소녀 소피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온다. 거기에는 단지 이렇게 적혀 있다.
‘너는 누구니?’
‘소피의 세계’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너는 누구니?’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질문을 받고 의문을 가지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질문은 이 물음표 하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온갖 지식 중에서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에 열병을 앓으면 천착했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의문도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가 근원에 관한 질문들이다.
개인적으로는 40대 중반에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의 회오리에 말려 들어갔고, 그래서 인생관의 대전환이 생겼다. 옳다고 믿었던 것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소한 것들이 엄청나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준 결과였다.
사실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거기에는 백인백색의 반응만이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무언가를 얻고 성취하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에 있다. 인생이란 과정이며, 걸어가는 길이다. 우리가 이루고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은 그 과정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다. 소신껏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개인의 소신이란 것이 얼마나 편협되고 어리석을 수 있는지 주변에서 수없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옳다고 믿으며 산다. 그렇다면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것이고, 누구의 생각은 그른 것인가? 모든 사람이 옳은가, 아니면 모두가 틀렸는가?
그것을 판단할 절대적 잣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캄캄한 길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이정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이 아닐까 한다.
‘너는 누구니’는 질문을 위한 질문일 수 있다. 그것은 질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현인들의 어떤 철학적 견해도 스스로에게 묻는 이 질문의 가치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적 질문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객관적 결론으로 유도되지만, ‘너는 누구니’는 소우주로서 한 개체인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세계에 눈을 뜨도록 하는 질문이다.
물론 보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희미하게 보고, 어떤 사람은 좀더 선명히 볼지 모른다. 그러나 뭔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에 공통된 어떤 요소가 있는 것도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이 질문에 대해 ‘이것이요’ 하고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질문으로 인해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내 안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