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존재하지 않는 세계

샌. 2005. 6. 2. 15:12


대림미술관에서 장 보드리야르 사진전을 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며 현대성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사상가가 사진전을 연다고 하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장 보드리야르는 지난달에 열린 서울국제문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독창적 이론인 ‘시뮬라시옹(Simualtion)'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시뮬라시옹은 실재가 가상실재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가상실재의 세계, 즉 시뮬라크르의 환상 속인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이 한창일 때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강하게 비판한다.


현대화가 진행된 사회는 어느 시점에선 원본과 모사본의 차이가 없어져 버린다. 그 뒤에는 모사본을 본뜬 또 다른 모사본이 등장한다. 그런 이미지는 실제의 반영이면서 실제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가상과 현실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무 의심 없이 지내왔던 현실세계가 어느 순간 허상에 불과한 가상세계였음을 알게 될 때의 놀라움은 영화 속만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장자에 나오는 나비의 꿈을 연상시키고, 또 매트릭스나 큐브 같은 영화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것들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이미 실재의 의미는 사라지고 가상 이미지의 지배를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현대인의 소비 패턴 또한 물건의 원래 기능 보다는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신과 권위에 기울어져 있다. 현대인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호를 소비한다.

현대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의 시대이다. 우리는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현실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미래에는 완벽한 가상현실에 묻혀버리게 될 것이라고 장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현실에 대해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세대, 새로운 식물이나 종처럼 유전학적으로 조작되고 컴퓨터화 되어서 현실이나 역사를 겪지 못한 새로운 인류의 종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의 흐름을 통제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런 사실이 이미 이 세계가 고도로 암호화되고 프로그램화된 세계임을 증명해 주는지 모른다.

그래서 문명이 가는 길이란 창세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사진전의 제목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작자는 자신의 사진들에서 의미를 찾지 말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느끼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들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 그나마 가볍게 볼 수 있고 눈에 띄는 작품이 포스터에 나와 있는 이 사진이다.

유리컵에 비친 베르사이유 궁전을 찍은 것이라는데 둥근 유리 표면에 비친 반영이 나에게는 사진전 주제와 그런 대로 연결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함 때문인지 밖으로 나서는 마음이 무겁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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