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세상이 무섭다

샌. 2005. 3. 22. 14:07

등 뒤에 한 무리 중학생 아이들이 따라온다.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스치며 지나간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말 한 마디가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또 하나 디졌다.”

옆의 아이들이 따라서 킥킥대며 웃는다.


‘디졌다’ 또는 ‘뒈졌다’는 죽는 대상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인데 짐승이나 미물에게라도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에게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상이 너무 살벌해지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언어 표현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잠시만 있어보면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인 경우가 많다.


저 아이들에게 뭐라고 설교를 해야 할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생명의 아픔에는 같이 연민을 느껴야 한다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지 설명해 줄까?


과연 저 아이들만 나무랄 수 있을까?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이들의 심성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우리 사회는 누가 만들고 지켜가고 있는가?


잔인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개구리를 뜨거운 물 안에 집어넣으면 놀라서 금방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찬 물에 미리 개구리를 넣은 뒤 아주 서서히 온도를 높여주면 개구리는 뜨거워지는 온도에 적응해서 도망 나올 생각도 못하고 서서히 죽어간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이런 개구리의 열탕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반생명이며 죽음의 문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여기에 길들여져서 자신들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청맹과니들이다.


세상은 어느새 정글로 변했다.

자본과 소비의 문화가 ‘만인은 만인의 적’이 되어야 함을 외쳐대고 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과연 무엇이든가?


지난해에 네팔을 다녀온 한 분이 네팔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잊지 못하겠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같은 나이의 어린이들이건만 이미 한국의 아이들 눈동자에서는 그런 빛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치원 들어갈 나이가 되면 벌써 아이들은 어른의 눈빛을 닮는다. 영악스러움, 그걸 어른들은 똑똑하다고 박수치며 부추긴다.


언젠가 PC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인데 모두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에 보이는 장면은 하나같이 찌르고, 쏘고, 죽이고 하는 폭력적인 것이었다. 붉은 피가 낭자한 잔인한 화면에 눈을 때지 못하는 아이의 옆모습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가지 못할 길이 무엇인가? 아이들의 심성이 파괴되든 말든, 자연이 죽어가든 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본은 자신의 길을 간다.


사이버 세계와 현실의 구별이 어려워지면서 이런 폭력 게임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사람 목숨쯤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면서 “또 하나 뒈졌다”고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의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다.

공기도, 물도, 땅도 정상이 아니다. 환경이 오염되니 이젠 먹을거리가 온전치 못하다. 언젠가의 보도에는 모유가 오염되었으니 가능하면 모유를 유아에게 먹이지 말라는 말도 나왔다. 이것이 분유 회사의 논리만도 아닌 것 같다.

태아 때부터 화학물질의 세례를 시켜주니 어찌 인간의 정신이 올바르길 바라겠는가. 이 시대 인간 심성의 황폐화는 분명 먹을거리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내가 너무 비관적인 복고주의자가 된 것 같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고 문제가 없었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옛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에는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해 보고 싶다. 기존 체제의 답습으로는 절망뿐이다.

그리고 희망의 출발점은 각 개인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국가도, 종교도, 다른 그 무엇에도 기대할 수는 없다. 구원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명제는 역시 옳은 말이다.


지나가는 구급차를 쳐다보며 “또 하나 뒈졌다”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아이들이 만들 미래는 어떤 것일까?

아무리 낙관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발걸음이 무거워 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0) 2005.04.13
출산 장려 운동  (1) 2005.04.04
대장부  (1) 2005.03.15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0) 2005.03.04
반추동물 장내발효 개선 연구  (0) 2005.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