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대장부

샌. 2005. 3. 15. 17:19

지난번에 살던 동네의 연세가 들었던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은 자신의 남편을 늘 장부라고 불렀다. 집안 얘기를 할 때면 “우리 집 장부가.......” 하는 식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장부(丈夫)란 뜻이 다 자란 건강한 남자라는 의미 외에도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왠지 어색했는데 그것은 장부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어떤 호탕하고 소위 남자다운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만난 남편의 모습이 왜소하고 부드러워서 장부라는 호칭과의 거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장부가 그러한데 대장부(大丈夫)의 이미지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영웅호걸쯤 되어야 불릴 수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다.

그것은 남자라면 한때 가슴을 울렁거리며 외었을 남이(南怡) 장군의 이런 시 탓일지도 모르겠다.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에 있는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네.

남자 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그러나 진정한 대장부는 과연 누구인가?

말을 몰고 대군을 지휘해서 나라를 평정하고 위세를 떨쳐야 대장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작고 부드러운 남자가 진정한 의미의 대장부일 수도 있고, 권력을 탈취하며 한 시대에 이름을 남겼어도 졸장부인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장부가 꼭 남자여만 하는 법도 없다. 그 품은 뜻이 고상하고 의(義)의 길을 걸어간다면 여자라고 대장부(大丈婦)가 되지 못할 법도 없을 것이다.


대장부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맹자(孟子) 편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경춘(景春)이란 사람이 맹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사람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는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성을 내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조용히 하면 천하가 잠잠해지니 말입니다.”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어찌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있겠소. 그들은 임금의 뜻에 순종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니 일개 필부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면서 맹자는 대장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며

천하의 가장 올바른 지위에 서서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해야 하오

그리하여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들과 함께 더불어 나아가고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는 홀로 그 도를 행하며

부귀도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못하고

가난하고 천하여도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으로도 그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없으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대장부가 아니겠소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란 이(利)가 아니라 의(義)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그의 뜻을 얻었든지 얻지 못했든지 대장부는 자신의 길을 간다. 재물도, 출세도, 다른 무엇도 그의 지조를 꺾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장부는 자신의 일에만 갇힌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얼마 전 동양철학을 전공하신 어느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맹자가 말하는 대장부에는 나눔의 정신과 우환의식(憂患意識)이라는 개념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우환의식이란 남의 근심을 나의 근심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한 몸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근심걱정에는 일조지우(一朝之憂)와 종신지우(終身之憂)가 있다고 한다. 일조지우는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고, 종신지우는 이웃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인데 대장부라면 마땅히 종신지우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만 나라를 걱정하며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많은 정치인들, 그들의 풍채는 대장부를 닮았을지 몰라도 속은 졸장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무래기들이 모여 있으니 정치판은 맨날 싸움박질만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장부는 깊은 산골에서, 들판에서, 아니면 도시의 시장골목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런 대장부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도 점점 맑아지고 밝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맹자를 깊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장부를 설명하는 위의 글은 늘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뜻을 얻지 못해도 홀로 나의 길을 가며,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내 길을 막을 수 없다.’

그런 의기가 너무 부럽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 또한 크다.

그리고 맹자에 나오는 또 하나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이 한 구절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나 싶다.


孟子曰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맹자가 말하길 “대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결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 장려 운동  (1) 2005.04.04
세상이 무섭다  (2) 2005.03.22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0) 2005.03.04
반추동물 장내발효 개선 연구  (0) 2005.02.22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0) 2005.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