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샌. 2005. 3. 4. 18:14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으로 얼마나 커다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민박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 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보, 새싹 비빔밥, 뼈 발린 닭…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잔인한 음식점 이름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우리는 여름마다 수마란 말을 듣는다. 수마(水魔). 몸의 거지반 물로 된 사람이 물에게 ‘마’란 말을 쓸 수 있을까. 아무리 물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도 마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있을까. 물길에 사람들이 살아 피해를 본 것 아닌가. 사람들이 대기의 온도를 올려놓아 물의 순환 질서를 어지럽힌 결과로 폭우 피해를 보는 것 아닌가. 설사 피해를 크게 보았다고 하더라도 마란 말을 쓰지 말고 옛사람들처럼 그냥 ‘큰물’이 났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자연보호’란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자연을 얕잡아 보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자연이 사람의 보호를 받을

만큼 나약한 존재인가, 그런 생각으로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가 있을까. 자연보호란 글만 보면 신경이 곤두섰다.

지난 여름 구미 금오산에 갔었다.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오르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어디서 캐 왔는지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큰 바위에 써 있는 글귀 때문이었다. ‘자연보호’란 큰 글씨는 충격이었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바위를 옮겨 세워놓고 그 바위를 정으로 쪼아 자연보호란 글씨를 새길 수 있을까. 이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 기념비를 세운 내력에는 금오산이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라는 글귀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에 올라 쓰레기를 줍고 자연보호에 힘쓰라고 지시한데서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글귀 앞에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 속에 북한산 나들목에서 보았던 바위에 써놓은 자연보호헌장이 떠올랐다.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표시하며, 자연보호란 글귀가 쓰여 있는 표식을 철사줄로 나뭇가지에 붙들어 맨 것을 보았던 기억이 살아났다. 결국 철사줄에 묶인 나뭇가지는 성장을 못해 죽고 말텐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오산 맑은 물소리는, 사람이여서 미안한 마음을 그래도 맑게 닦아주며 흘러 내렸다. 자연보호란 말의 잘못된 쓰임새를 발견한 뒤로는 우리가 쓰는 말에 의미를 되새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땅이 거북 등처럼 갈라졌다. 거북 등이 갈라지면 거북은 죽는데 거북 등 무늬 모양으로 갈라졌다고 써야 옳지 않을까.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다. 민중은 모두 지팡이가 필요한 만큼 나약한가. 민중을 얕잡아보던 군사독재 시절에 쓰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습관은 시 쓰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령 공기총이란 시에서는 공기를 총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점을, 식물인간이란 말을 생각하면서는 식물이란 말도 무섭게 들려 올 때가 있음을, 이라크 전쟁 때는 폭탄 중에 어머니란 별명을 가진 폭탄을 생각하며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는 미국사람들의 충격적 정서에 대해 썼다.

 

요즘에는 내가 세상을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풀을 베다가 쉬면서 맡는 풀 냄새는 정말 향기로운 것일까. 몸 잘린 풀의 냄새가 향기롭다니. 새소리가 정말 아름답게 들리는 것일까. 새소리에 나비가 놀라고, 놀란 나비가 다가오던 방향을 바꿔 실망한 꽃빛깔이 순간 옅어 졌을 텐데. 내 감각 안에 잔인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폭력성이 이미 내재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못 먹게 된 썩은 음식에서만 악취를 맡는 내 후각도 감각 안에 있는 폭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

 

내재된 폭력성을 이마에 버젓이 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는 폭력 냄새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되새겨보지 않고 묵인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쓴 시집들은 제목으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는 않았을까. 함부로 쓴 싯구절이 사람들 마음이나 나무들 생각이나 새들의 눈빛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을는지, 나 먼저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공기를 짓이겨

공기를 압축하여

공기를 쟁기질하며 나는 새나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짐승을 잡던

우리들의 폐에 날아와 박히고 있다

우리들이 경쟁적으로 내뿜는 산업화 열기와

방사능에오염된삼중수소아황산가스스모그프레온가스

깨 진 오 존 층 파 편 이

납덩이가 되어

산탄 외탄 총알이 되어

주말이면 어린아이 손잡고

숲으로 강으로 피난 나갔다 돌아오는

산으로 바다로 치료받으러 갔다 돌아온

우리들의 몸에 세포에 날아와 박히고 있다

과녁이 과녁을 향해 총을 쏘아 대고 있다

공기는 총이 아니었으나

생명을 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부드러운 공기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추방되어야 할 뿐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공기를 향해 함부로 입을 겨누어서는 안 된다 (공기총 / 함민복)


- ‘작은 것이 아름답다’ 2월호에 실린 함민복님의 ‘폭력 냄새나는 말들’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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