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펌] 저 황금빛 들녘의 비애

샌. 2004. 10. 26. 14:03

경남 밀양의 가을 들녘을 걸으며 눈이 시리다 못해 충혈이 되도록 안부를 묻는다. 청명한 가을 햇살과 찬 서리를 맞아 속살부터 단맛이 차오르는 얼음골 사과의 표정으로, 그리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사자평 억새꽃의 이름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 그대는 정녕 이 가을에 행복하신가.

220일을 넘도록 걷고 걸으며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수상하고 수상할 뿐이다. 황금빛 출렁이는 저 들녘의 풍요는 어느새 풍요가 아니라 처절한 결핍이 되었다. 추수의 '감사'가 아니라 농산물 수입개방 문제 등으로 인해 생존권 사수의 '결사'가 되었다.

이따금 참새들이 날아와 벼이삭을 쪼더라도 화를 내는 척하지만 어느새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허수아비들의 여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은 내려져 논두렁마다 뱀의 허물처럼 버려지고, 저 거짓의 풍요 앞에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고사하고 천박하고도 근시안적인 '웰빙' 바람이 불고 있다.

웰빙, 슬로푸드, 친환경 이 모두 얼마나 좋은 말들인가. 그러나 다급해진 건강문제 등 먹거리로부터 시작된 생명위기의 진단, 그 해결책이 이 정도라면 아무래도 수준 미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탐진치(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3독을 넘어서려는 뼈아픈 노력 등 삶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외면한 채 단기적인 응급처방으로 등장한 것이 웰빙 바람이라면 이는 일종의 자본주의적인 기만일 수밖에 없다.

농촌은 농촌대로 급속한 공동화 현상과 농산물 수입 개방에 따른 공포감으로 무너지고, 도시는 도시대로 급팽창하고 있지만 이마저 정신적이나 경제적인 공황상태에 접어들었다. 농촌에서의 웰빙도 기대할 수 없고, 도시에서의 웰빙도 도대체 성립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다면 정치와 경제에서의 웰빙은 또 어떠한가.

행정수도 이전 논란과 이라크 파병에 따른 테러의 공포,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친일 청산 문제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작금의 상황을 보면 진실과 거짓의 분별지마저 허물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경제난'을 이유로 이 모든 것들마저 무시되고 있으며, 역사와 민족과 국가의 정의마저 오직 경제의 이름으로 '적당히' 유배되고 말았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위해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왠지 자꾸 '피냄새'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들 조국의 이름으로 주의주장을 하지만 절절한 그들의 '조국애'에 자꾸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어쩐 일일까. 60년이 지나도록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날들이 법 위의 법인 국가보안법으로 안전하게 이어지고, 마침내 젊은이들이 미국의 용병이 되어 사지인 이라크로 내몰리는 것은 아닐까.

미국이 내세우는 '테러와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전쟁인가, 아니면 또 다른 국가적인 테러인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이 확연하게 무너지는 시점에서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테러인가, 전쟁인가, 평화인가, 통일인가. 정녕 우리가 경제난을 핑계 삼아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은 혹시 테러와 전쟁이 아닌지.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혹시 생명평화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이 이리도 각박하고 살벌하겠는가.

단 하루도 생명평화의 날들을 살아보지 못한 이들이 정치를 하고, 단 한번도 상생과 화해의 손짓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 경제를 얘기하고, 지난날의 참회는커녕 거듭거듭 죄를 짓는 이들이 툭하면 민족과 국가를 들먹이니 실로 꼴불견이 아닌가.

청정 지역 밀양의 황금 들녘을 걸으면서도 가슴이 답답하다. 불행한 일이지만 풍요는 고사하고 비애를 느낄 뿐이다. 들판에 누워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본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자꾸 부끄러운데, 그래도 갈 길은 멀다.

둘러보면 볼수록 전쟁과 테러와 파괴와 대결구도뿐인 세상에도 어김없이 성큼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성과 참회의 계절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전쟁'은 없고, '나쁜 평화'도 없다.

- 이원규 / 시인, 생명평화탁발순례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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