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저녁

샌. 2004. 11. 9. 14:35


저녁 어스름이 좋다.

이때는 낮과 어둠의 경계선에 있는 짧은 순간이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면서 사물들은 시시각각 어둠 속에 잠긴다.

낮 동안 색깔을 현란하게 뽐내던 존재들이 이제는 자신의 숨결을 거두고 동일한 회색 톤으로 변해간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똑같이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이때는 돌아감의 시간이고 휴식의 시간이다.

세상의 일들로 소란스러웠던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창 앞에 선다.

멀리 앞집에서 아까부터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느릿느릿 흰색 연기가 처음에는 옆으로 퍼져 나가더니 지금은 곧장 위로 올라가며 십자 모양을 만든다.

아마도 김씨가 사랑방에 군불을 넣고 있을 것이다. 처음 터에 자리 잡았을 때 자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는데 지금은 조금 소원해졌다.

늦가을의 저녁, 추수가 끝난 농촌 풍경은 쓸쓸하다.

우리네 삶의 모습도 실상은 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주함과 소란함 뒤에 묻혀 의식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우리는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저 풍경이 쓸쓸한 애상만 주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따스한 온기가 있다. 결코 차가운 금속성의 날카로움은 아니다.

문득 세상을 떠난 한 분이 생각난다.

세상의 끈을 놓기 전 그분의 마음은 저 들판처럼 쓸쓸했을까? 마음밭에 가꾸던 꿈과 희망이 싹둑 잘리우고 오직 홀로인 채 무슨 생각을 품고 저 세상으로 떠났을까? 아니면 쉼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한시라도 빨리 이승의 인연을 놓고 싶었을까?

저녁이 가면 밤이 찾아오고, 아무리 밤이 길더라도 다시 아침은 온다.

세상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 떠들썩하고 활기에 넘칠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지 않아 다시 어둠에 묻히리라.

이 늦가을 저녁 시간에 떠오르는 상념들 또한 한없이 쓸쓸하다.

그런 쓸쓸함이 있어 이때가 더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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