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익숙한 것과의 결별

샌. 2004. 11. 30. 13:31

IMF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이나 파산을 당했다.

한 순간에 찾아온 낯선 환경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

익숙한 것에서 떠난다는 것은 가슴 쓰라린 일이지만 그런 결별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가 씌어질 수 없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에게 있어 어느 순간 불가항력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에게 있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도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말로 쓰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만약 내가 사회학자라면 조사, 연구해 보고 싶은 바램도 있다.

그런 외적인 충격이 한 개인에게 어떤 내적인 인생관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그래서 삶의 양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추적해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게 있어서 익숙했던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힘든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발전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결별의 대상이 재물이나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결별이란 한 사람의 인격 전체, 또는 그 사람의 삶의 양식에 대한 이전의 태도에서의 헤어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근본적이며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결별일 것이다.

사회적 격변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간 사람들이 탐욕스런 세상에 더욱 극악스럽게 매달리느냐, 아니면 같은 노동을 하더라도 지향하는 가치가 달라졌느냐에 따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남긴 열매는 다른 것이라고 본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전적 정의로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 체계'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이런 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수 백년 간 누적된 과학 지식이 쌓여서 과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그 틀 안에서 과학자들은 우주를 해석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 있어 과학적 발전은 한 패러다임 내에서의 지식의 증가가 아니고 패러다임 자체의 붕괴에서 온다. 이런 것을 과학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낡은 세계가 깨어지지 않고서는 새 세계가 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새 패러다임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낡은 패러다임으로 변하고, 또 다른 혁명을 기다리며 과학은 발전해 나간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작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패러다임이란 한 사람의 인격, 가치관, 삶의 양식 등이 합쳐진 통합체이다.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이 깨지는데 수 백 년, 어떤 때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듯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의 패러다임 변화는 그만큼 지난하다.

옛 친구를 수 십 년만에 만났는데도 예전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생각하는 패턴이 어쩜 그리 똑같은지 인간의 사고의 틀은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나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자신의 방식에 점점 길들여져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견해에 고착화되어 간다.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안온한 삶의 스타일에 아무 변화 없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개인에게는 가장 편안한 삶이 될 것이다. 실제 자아는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생들이 한 번 받아들인 생각이나 형상에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십 년 간 누적되어 형성된 이 개인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자아의 틀과 결별하는 일이야말로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진정한 내적 혁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미완(未完)이다. 만남은 또 다시 헤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가 꼭 사람만이겠는가? 산다는 것은 유형, 무형의 온갖 대상들과의 관계를 맺고 푸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욱 진하게 헤어지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뭔가를 꿈꾸고, 뭔가를 만나고, 뭔가에 익숙해지면서 이미 결별의 씨앗은 싹이 트고 있을 것이다. 문득 찾아올 결별은 아프지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므로 결코 보이는 그대로의 상실만은 아니다. 그 결별의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아름답다.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 우수수 나뭇잎을 내어주고 쓸쓸한 겨울나무가 저기에 서 있다. 빈 몸의 겨울나무는 올 겨울에 단단한 나이테를 하나 더 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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