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선택

샌. 2004. 10. 8. 13:40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면 경제적 능력에 상관없이 자가용을 갖는 것을 포기하거나 소형차로 만족할 것이다.

이런 선택에도 분명 옳은 선택과 그른 선택, 아름다운 선택과 그렇지 못한 선택이 있다.

물론 그 판단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에 시류에 영합하고 식민 정책에 앞장 선 지식인들이 지금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아마 당시에는 그럴 듯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변호했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중대한 선택을 해야될 때 절대적 기준은 없더라도 선택의 좌표로 삼을만한 일반적인 기준은 있다고 본다.

나는 그 기준으로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생명 우선의 가치, 그리고 사리(私利)의 포기를 제시하고 싶다.

겉으로 표방하는 정의나 법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많음을 안다. 그동안 현학적인 논리에 속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나는 보통 약자의 편을 선택한다. 그 길을 따를 때 허방에 빠지는 일이 적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선택이 한 개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책임을 지면 그만이지만, 어떤 선택이 사회나 국가 전체에 미치는 것이라면 그런 선택은 당연히 역사적 책임이 따라야 한다.

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선택은 현실을 초극하여 인간 성장의 길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리게 되는 순수한 결단이 아닌가 한다.

며칠 전에 수도회에 있는 벗으로부터 충격적인 메일을 받았다.

수도회에 들어간지 30년이나 되는 벗은 이제 수도복을 벗고 보통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고민을 하는 벗의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놀라운 결정을 하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수도자로서의 신분이 세상을 위해 소중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저에게는 수도자로서의 삶보다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열정적인 삶도 소중하다고 느껴져

남은 생애는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삶의 틀을 180°로 전환하는 이 선택에 벗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눈물을 흘렸을지 나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마음 한 쪽에서는 벗의 아직도 식지 않고 있는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 부럽게도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관성적인 삶을 살고 있다. 가슴 한 쪽에서 살포시 생겨나는 꿈과 이상은 현실이라는 수레바퀴 아래서 무참히 부서지고 만다. 그 꿈과 이상이 영글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경우는 드물다.

비슷하게 보이는 삶이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질은 천양지차가 날 수 있다.

험한 세상으로 뛰어든 벗이 새로운 환경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길 기도한다.

분명 확실한 것은 새가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한 세계는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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