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제초제는 싫어요

샌. 2004. 7. 14. 17:43

여름이 되니 풀이 엄청나게 빨리 자란다.

보통 잡초라고 부르는 것인데 터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그다지 많은 종류는 아니고 대략 예닐곱 종류쯤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이름을 아는 것은 질경이와 비름, 두 종류뿐이다. 아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화초였다면 어떻게든 그 이름을 알아보았을 것인데 아무 쓸모없다고 여기는 잡초 신세라서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으니 그 풀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서부터는 터에 내려가서 하는 주된 일이 풀을 뽑는 것이다.

그것도 집 주변의 풀을 뽑기만도 벅차다. 좀 떨어진 빈터에는 온갖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나게 자라고 있다. 키가 큰 것은 가끔씩 뽑아주지만 바닥에 기면서 자라는 것들은 손을 댈 엄두도 못 낸다.

저 놈들이 게으른 주인을 만나 이만큼이나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니 나한테 감사한 마음이나 갖고 있을지나 모르겠다. 부지런한 이웃집 아주머니는 초록의 기미만 보이면 호미로 긁어버리니 그쪽 마당의 풀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요절해 버리는 셈이다. 아니면 무자비한 제초제 세례를 받아 누렇게 비명횡사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터를 보는 이웃 분들은 혀를 끌끌 찬다.

드러내 놓고 표현은 안 하지만 제대로 일을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초제를 뿌리지도 않고 지저분한 채 놓아두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뜻이 하는 말들 뒤에는 숨어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지가 무슨 환경을 생각하고 유기농법을 실천하는 척 까부느냐는 속내가 있을지도 모른다.

작년 가을에는 보다 못했는지 동네의 어느 분이 분무기를 지고 가다가 허락도 없이 터의 통로에 있는 풀에다가 제초제를 뿌려 버렸다. 그래서 풀들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은 편치 못했다. 누렇게 시들어 생명을 마친 모습보다는 비록 쑥대밭이지만 녹색 생명의 향연을 보는게 내 눈에는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금년에는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분도 이젠 포기했는가 보다.

너무 풀이 무성해서 한 때는 제초제를 확 뿌려볼까하고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린 것은 땅 속에 사는 또 다른 생명과 만나고부터이다. 흙은 단순히 흙만이 아니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생명들이 거주하는 집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은 풀을 뽑기 위해서는 호미로 땅을 파야 한다. 그때 뒤집혀져 나온 흙을 따라서 주로 지렁이가 많이 나온다. 밖에 나와서는 햇빛에 놀랐는지 몸을 꿈틀거리며 심하게 요동을 친다. 그러면 다시 곱게 땅 속으로 돌려주면 내 마음이 편하다. 어떨 때는 호미에 몸이 잘리게 되어 안타깝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렁이는 두 도막이 나도 다시 새로운 개체로 살아간다는 말에 위안을 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어느 날은 와-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된 일이 생겼다.

호미로 파낸 흙 속에서 갑자기 땅강아지가 튀어나온 것이다. 붙잡으려다가 잠깐 사이에 놓쳐 버렸지만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나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마당이나 밭에는 이 땅강아지가 무척 많았다. 그래서 농촌 아이들의 친구며 놀이감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땅강아지를 근 40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땅강아지는 땅 속에 사는데 갈색의 몸은 의외로 말끔하다. 귀엽고 깔끔한 동물이었다는 인상이 남아있다. 아마도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동작은 아주 민첩해서 쉽게 잡기가 힘들다. 그리고 앞에는 집게발이 달려있어 손가락에 대면 깨무는데 그 느낌이 간지럽기도 하고 따끔하다. 아마 어린 시절에는 그런 장난을 하며 놀았던 것 같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우리 곁을 떠난 생물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땅강아지도 그 대표적인 동물이 될 것이다. 농약의 살포로 토양이 오염되고 그래서 땅 속에 사는 땅강아지는 거의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잊혀졌던 땅강아지를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제초제 뿌릴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게 되었다.

보기에는 지저분하고 또 풀을 뽑는데 몇 배의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앞으로도 터에 농약을 칠 생각은 없다.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자라는 풀과도 공존하는 지혜를 배우고 싶다. 그것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땅강아지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되면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땅강아지와 반갑게 대면할 내 명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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