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출퇴근길의 중간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옛날 권력자들의 안가로 사용되었던 집들을 헐고 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공원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몇 종류의 꽃들도 자라고 있다.
흠이라면 너무 인공적이고 깔끔한 것인데, 그래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과거에는 여기가 서슬 퍼렀던 높은 분들의 회식과 밀담 장소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같았으면 감히 옆을 지나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원 한 귀퉁이에 모란이 피었다가 얼마 전에 보니까 꽃잎이 모두 떨어졌다.
싱싱한 꽃잎이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동백만큼 비장하지는 못해도 왠지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라고 노래한 시인처럼 모란이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이나 봄을 여윈 설움이라는 느낌이 떨어진 모란 꽃잎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식물의 일년에서 꽃이 피어있는 시기란 아주 짧다. 사람은 꽃에 주목을 하지만 사실 식물에게서 꽃은 목적이 아닐 것이다.
핀 꽃은 떨어져야 하고, 그래야 식물은 성장하고 후대를 기약하게 된다. 가을의 열매조차 동물에게 먹히고 땅에 파묻혀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철리(哲理)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은 늘 호오(好惡)의 감정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한다. 누구에게나 알게 모르게 모란으로 상징되는 지고의 가치를 두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물질이든, 추상적인 이념이든 어떤 면에서는 인간 삶의 동력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모란이 떨어진 날, 사람은 온 봄이 다 사라진 듯 설움에 겨울 것이다. 찬란한 봄이 어느새 슬픔으로 변한다. 그러나 봄 속에는 이미 낙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봄과 낙화는 결코 둘로 나눌 수 없다.
땅에 떨어진 모란 꽃잎을 보며 성숙을 위해 한 세계를 미련없이 버리는 자연의 지혜를 배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고, 그 열매마저 땅 속에 묻혀야 내년 봄은 다시 풍성하게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