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능원사에서

샌. 2004. 5. 27. 15:33

터에 오가는 길에 능원사가 있다.

그 앞으로 지나다니기만 했는데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축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능원사에 들렀다.

어릴 때 외할머니를 따라 간 초파일 날의 절 분위기가 내 머리에는 아직 남아있다.

고향 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청계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평시에는 들어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적했다.

그런데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여러 마을에서 모인 할머니, 어머니들로 좁은 절은 축제터로 변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도 얻어먹으며,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밑에서 사람들은 마음 속 소원을 부처님께 빌고, 그 가피를 믿으며,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을 경축하는 축제의 날, 이 정도가 석탄일에 대한 내 이미지였다.

그런 기대를 갖고 들어간 능원사는 초입에서부터 영 분위기가 이상했다.

<능원사 풍경. 부처님 오신 날인데도 신자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

넓은 주차장에는 두세 대의 차만 있고,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어온 줄 알았지만 화려한 색깔의 연등이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사찰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워낙 사람들이 없어서 걷는 발걸음도 저절로 조심스러웠다.

가만히 법당 옆을 지나는데 스님이 나오셔서 빙긋 웃으시더니 구경 잘 하라며 말을 건넨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다고 하니까, 신자들은 오전에 행사를 마치고 모두 돌아가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능원사는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기존의 특정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신자들 관리도 기성 사찰같이 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종교를 묻기에 가톨릭이라고 대답했더니 종교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 물어보지는 못했다. 건물 외형도 특이하고, 불교적 분위기지만 지금껏 접해왔던 것과는 다른 뭔가 이국적인 냄새도 느껴졌다. 건물의 구조나 배치도 전통적인 것과 달랐다.

넓은 법당 안에서는 한 여인이 부처님을 향해 끝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 저 여인은 무슨 원을 가지고 텅 빈 법당 안에서 저렇게 몸을 낮추고 있는 것일까?

부처님 앞에 머리에 이고 간 공양미를 바치고 옛날 우리의 할머니들도 뭔가를 빌고 소원했을 것이다.

불교는 천년 이상을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간난(艱難)했던 시절을 산 우리의 연약한 할머니들을 위로해 주고 희망을 줬으리라.

할머니들에게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고, 불교의 교리가 무엇이며,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된 현실을 견디게 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주는 의미에서 종교의 역할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힘든 인생 길에서 내 마음을 읽어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기뻐해 줄 절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을 버텨낼 힘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예수나 석가, 다른 성인들의 가르침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배타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스님이 말한 대로 종교나 종파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각자는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결국 언젠가는 한 길에서 만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시끌하고 흥겨운 분위기 대신에 의외로 조용한 절 능원사에서 부처님 오신 날에 색다른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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