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샌. 2012. 11. 25. 08:36

초판이 나온지 20년이 넘은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며 고향에 있는 두 아들, 흑산도에 유배된 형,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엿보는데 편지만큼 솔직한 것도 없다. 다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근엄한 학자가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만나게 된다. 다산 역시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했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기뻐했다. 지켜야 할 예절에서부터 채소밭 가꾸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또한 형의 건강을 염려해서 개고기 요리하는 법까지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절로 미소가 일어난다.

 

번역한 이는 다산을,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 같은 한 줄기의 민중적 의지로 75년 동안 치열하게 살다가 사라져간 위대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민중적 시각에서 다산을 보는 점이 참고할 만하다. 단순히 많은 책을 쓰고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분의 시나 저서를 통해 한결같이 나타나는 비판의식과 고발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폐족(廢族) 집안임을 자주 언급했듯 선생은 벼슬을 박탈당하고 죄인이 되어 18년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선생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 중 생을 마쳤고, 둘째 형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되어 순교했다. 선생이 절망과 고통, 인간적 아픔을 어떻게 견뎌냈고, 무엇에 희망을 가졌는지를 이 편지집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다산은 아들이나 제자들에게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길 권한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학문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고 선생은 확신하고 있다. 선생이 권하는 책을 보면 선생 역시 어쩔 수 없는 유학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노자나 장자는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는데 은둔을 비난하고 그런 류의 책 읽는 폐해를 말하는 걸 보니 굉장히 부정적인 것 같다.

 

아들이나 제자에게 주는 편지에서 선생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독서(讀書), 효제(孝悌), 근검(勤儉)이다. 책을 읽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 수양을 하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폐족(廢族)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 되겠느냐?'는 절규에 가깝다. 그리고 효제와 근검이다. 효제는 인간의 기본 도리이고, 근검은 빈부를 떠나서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가는 방법이다.

 

이 책은 두 번째 읽었다. 선생의 체취를 느끼는 데에는 제일 적절한 책이다. 유배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간 한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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