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시인의 서랍

샌. 2012. 11. 1. 16:34

이정록 시인의 재미있는 산문집이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중심으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 감명 깊게 그리고 있다.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가장 중심 되는 인물은 시인의 어머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시인이 시를 쓰는 소재도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얻는 것 같다. 시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곧 나의 얘기이기도 하다. 다른 아이보다 두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가 약자로 시달리면서 자란 이야기는 무척 공감된다. 또 현재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의 학교 현장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떠올리는 어릴 적 풍경에는 이런 게 있다.

 

'잔치를 준비중인 할머니께서 두부를 만들고 난 뜨거운 국솥 찌꺼기를 가지고 부엌에서 나오신다. 외양간 구유도 돼지집 밥통도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 배부른 소는 되새김질중이고 돼지는 코를 골고 있다. 구정물통도 잘름잘름하다. 할머니가 샘가 도랑 옆에 선다. 트위스트 추듯이 뜨거운 물을 버릴까 말까 양팔을 흔드신다.

"훠어이 훠어이. 얼른 비켜라. 뜨건 물 나가신다."

그렇다. 도랑 속 작은 생명들이 다칠까봐 헛손질로 위험 경고를 하신 것이다.

또 한 풍경이 떠오른다.

푹푹 찌는 보리밭 두둑,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작대기로 알지게를 두드리며 누런 보리 이삭에다 대고 소리치신다.

"내일 보리 벤다. 참말이여. 내일 새벽부터 보리 베니깐 서둘러라, 잉!"

보리밭에 깃들어 사는 들쥐며 두꺼비며 개구리며 뱀이며 각종 벌레며 새들에게 이사 가라는 거다. 밤사이 좋은 곳으로 떠나 새 보금자리를 잡으라는 말이다.'

 

시인은 이를 아름답고 거룩한 풍경이라고 한다. 속이 다 비치는 삼베옷에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린 거지꼴이었지만 그 안에 하느님이 깃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환경보호도 자연사랑도 인간존중도 거기까지만 가자고 한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마음들이 살았던 그때의 공동체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책에서는 그런 고운 마음들을 만날 수 있다.

 

글을 읽으니 시인은 자신이 쓰는 시처럼 사는 분인 것 같다. TV 뉴스를 보면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지만, 책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 글 중에는 '설렘과 그늘 사이에서 사는 것'이라는 제목이 있다. 시인의 삶을 그렇게 묘사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나라에 가려는 사람이 시인이지만, 동시에 그의 언어에는 그늘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렘과 그늘,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하는 말이다. 지금도 시인의 서랍에서는 아름다운 시가 곱게 자라고 있을 것 같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도둑  (0) 2012.11.20
고대 로마인의 24시간  (0) 2012.11.10
승자독식사회  (0) 2012.10.17
위로  (0) 2012.10.13
피에타  (0) 2012.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