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점심때가 지나면 시장기가 든다. 배는 고프고 집까지 가는 길도 멀면 어쩔 수 없이 외식을 해야 한다. 그때 내가 선택하는 건 짬뽕 아니면 순대국이다. 뭘 먹느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속을 시원하게 하고 싶을 때는 짬뽕, 고기 생각이 날 때는 순대국을 먹는다.
짬뽕과 순대국은 꼭 가는 집이 있다. '홍콩반점'은 짬뽕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 음식점이다.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이지만 그보다도 실내가 깔끔해서 좋다. 종업원도 여느 중국집과 달리 젊은이들이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으면 카페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은 음식값을 선불로 받는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신선해서 재미있다.
어떤 날은 매운 짬뽕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기분이 답답하거나 우울한 날은 매운 핑계를 대고 눈물이라도 흘리면 좀 시원해질 것 같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매운 정도를 손님이 신청하는 중국집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사이는 레벨 A를 주문하고픈 날이 자주 생긴다.
순대국을 맛있게 하는 집 이름은 '할매 순대국'이다. '홍콩반점'은 중심가에 있지만 '할매 순대국'은 후미진 골목에 있다. 순대국집 위치는 그래야 제맛이 난다. 실내도 허름해야 제격이지만 '할매 순대국'은 현대식이며 깨끗하다. 그래도 맛으로 보충하고도 남는다. 아줌마 두 분이 일하시는데 둘 다 연변 말씨다. 아마 오랜 기간 돈을 모아 같이 음식점을 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가고,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전에는 순대국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서울로 바둑 두러 다니면서 맛에 빠지게 되었다. 기원 아래에 순대국집이 있어서 점심은 늘 거기서 해결했다. 특히 겨울에 구수한 국물을 들이키면 속이 확 풀어지는 게 아주 좋았다. 그런데 국에 들어간 순대는 별로여서 항상 순대는 빼 달라고 주문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먹는 순대국에는 순대가 없다. 순대국이라기보다는 국밥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산책은 보통 두세 시간 정도 걸린다. 걷고 나면 속이 출출해진다. 그럴 때 짬뽕이든 순대국이든 모두 별미가 된다. 특별할 것 없는 내 식도락이다. 짬뽕이나 순대국은 서민 음식이면서 식당에 혼자 들어가도 눈총을 받지 않는다. 행복은 평범한 데서 온다. 늘 걷는 길, 늘 먹는 음식에서 나는 행복을 진하게 느낀다. 그때가 제일 마음이 편안하다.
최근 들어서 짬뽕과 순대국 외에 내 외식 메뉴가 하나 추가되었다. 갈비탕이다. 경안천변 한적한 곳에 한우집 둘이 나란히 있다. 점심에는 손님 대부분이 왕갈비탕을 먹으러 찾아간다. 긴 뼈에 붙은 갈비살이 푸짐하고 국물도 끝내준다. 이때껏 내가 먹어본 갈비탕 중 제일 맛있다. 어쩌다 허기가 질 때는 영양 보충을 위해 이곳으로 간다. 왕갈비탕 한 그릇이면 저녁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든든하다.
이곳의 단점은 대형 음식점이라 정감 있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나르는 음식을 보면 마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나오는 공산품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달랑 두 집인데도 빈부격차가 있다. 한 집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다른 집은 한산하다. 음식 맛은 비슷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종업원의 서비스는 확실히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분주한 걸 싫어하는 나는 대개 조용한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기표를 받고 몇십 분 기다리더라도 소문난 집을 좋아한다.
광주에 와서 만족하는 것 중에 하나가 주변에 괜찮은 음식점이 많다는 것이다. 전에 사당동 살 때는 외식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서 발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여기는 마음만 먹으면, 그래 그 집에 가자, 하면 된다.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광주에만 특별히 맛집이 몰려있지는 않을 것이다. 퇴직하고 나서 내 입맛이 별스럽게 변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짬뽕과 순대국 중 오늘은 뭘 먹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운동화를 신는다. 거기서 약간 더 호사를 한다면 9천 원짜리 갈비탕으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