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는 베트남보다 월남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월남 전쟁이 한창일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극장에 가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월남 소식이 꼭 나왔다. 한국군의 전투 장면과 베트콩 몇 명을 사살했다는 승전 소식, 그리고 대민 봉사활동이 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면사무소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월남 화보집을 재미있게 보았다. 매끄러운 종이에 선명한 칼러 사진이 실린 책이 아주 고급스러웠다. 월남의 아름다운 풍광도 그때 접했다. 씩씩한 군가와 함께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파월장병 환송식도 기억에 새겨 있다. 그러나 월남전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질 나이는 아니었다.
1975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으니 올해가 종전 4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32만여 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5천여 명이 전사했다. 부상자와 고엽제 피해자는 수만 명에 달한다. 불명예스러운 민간인 학살 사건도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쟁을 자유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반공 성전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진실은 늘 이면에 숨어 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을 통해 많은 이득을 보았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 도약을 이루었듯 우리나라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고도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외환 보유고에서 베트남 참전 병사 및 파월 기술자들이 보내온 금액의 비중은 평균 30%를 차지했다. 1968년에는 48%에 달하기도 했다. 수출 총액의 25~47%가 베트남 특수에서 나왔다.
참전은 경제적 및 군사적 이득이 주목적이었다. 또한 남북간의 긴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도 있다. 이 시기에 예비군 창설, 주민등록법 시행 등 현재 한국 사회의 원형이 등장했고, 1972년 유신 체제를 선포할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졌다. 애초에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시작한 동기부터 불순했다. 베트남인들의 정당한 민족 해방 및 통일 전쟁에 대한 외세의 부당한 간섭이었다. 당시 정세를 오판한 미국의 책임이 크다.
결국 베트남전쟁에서는 미군과 연합군이 패배했다. 가장 큰 원인은 베트남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데 있다. 부패한 정부를 아무리 군사적으로 지원해도 성과에는 한계가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통일 베트남을 인정하고 호치민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면 인적 물적으로 발생한 엄청난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전쟁으로나마 얻고자 하려 했던 검은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태균 씨가 지은 <베트남전쟁>은 전쟁의 명분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 책이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베트남전쟁 시기에 일어난 한국군의 학살을 들춰내면 아직 반발이 무척 세다. 파병 군인들로서는 자신들의 참전 의미가 훼손되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참전 병사들의 고통과 희생에 주목하는 동시에 한국군이 저지른 잘못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 역시 당당하게 인정할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