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아버지의 땅

샌. 2017. 10. 16. 13:57

임철우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이렇게 묵직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마치 러시아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아버지의 땅>은 임철우 작가의 단편집이다. '아버지의 땅'을 비롯해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임철우는 주제 의식이 뚜렷한 작가다.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체제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헤친다. 둔중하지만 여운이 긴 울림이 있다. 내용은 어둡지만 문체는 간결하고 짜임새가 치밀하다. 단편소설의 전범을 보는 것 같다.

 

작품 중에서는 '그들의 새벽'과 '사평역'에 호감이 간다. '그들의 새벽'은 거대 폭력에 굴복하며 보신에만 몰두하는 우리들 소시민을 비유적으로 그린다. 이런 태도는 군화 발자국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것은 외면하고 그저 공기청정기를 들여놓는 것으로 만족한다. 결과적으로는 음모나 범죄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평역'은 다른 작품과 달리 서정성이 돋보인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풀어낸 작품인데, 시를 뛰어넘는 감동을 준다. 좁은 역사 안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면모를 통해 인생의 슬픔을 드러내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해 시에 대한 이해도 더 곡진해진다.

 

<아버지의 땅>은 1984년에 나온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초판 해설에서 김현은 임철우를 탁월한 서정 시인으로 소개하며,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자폐적 의식의 배경에는 불안과 부끄러움이 있다고 말한다. 불안과 부끄러움은 폭력적 상황과 맞서 있는 개별자들의 심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80년대만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의식이 트라우마가 아닌가 여겨진다.

 

"임철우의 세계는 어둡고 무섭고, 가능하면 빨리 거기에서 도망하고 싶은 세계이지만. 그 세계는 절제있는 감정 때문에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장식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장식적 아름다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간직한, 아니 차라리 극한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충전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세계는 아름다워야 한다고 외치는 아름다움이며, 더럽고 짐승스러운 것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의 세계 속에서, 세계의 무의미를 섬뜩하게 느낄 때, 누군들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의 작품을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장편소설이 작가에게는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오랜만에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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