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지는 것은 기자지상사(棋者之常事)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이기면 한 번 진다. 바둑을 두면서 요사이 깨달은 점은 질 때 잘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것보다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패한 바둑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
바둑이 수세로 몰리면 마음이 흔들린다. "졌습니다" 하고 깔끔하게 돌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도 별 위로가 안 된다. 이럴 때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졌을 때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지더라도 상큼하게 지자고 다짐하며 바둑판 앞에 앉는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습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기고 지는 데서도 벗어나고 싶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 잘 지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나중에 죽음을 맞아서도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패배자가 된다. 한탄하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추하다. 바둑을 통해 잘 지는 법을 익혀 놓으면 결정적일 때 유용하게 써먹을지 모른다.
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분이 80대 노인과 바둑을 두는데 상대가 십 분 넘게 장고를 하며 돌을 잡지를 않더란다. 워낙 위의 선배라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의자에 앉은 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얼마나 황당하고 놀랐을지 짐작이 간다. 수많은 죽음이 있지만 바둑 두다가 죽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유족들이 "우리 아버지가 신선 같이 돌아가셨다"고 바둑 둔 사람한테 고맙다고 하더란다.
바둑을 두다가 스르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노인은 얼마나 많은 복을 쌓았길래 그런 죽음이 찾아왔을까. 몇 년 전에 기원에서 쓰러지는 사람을 직접 보기는 했다. 뒤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나길래 보니 한 분이 의자에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119가 와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깨어났다는 소식은 뒷날 들었다. 나는 앞의 80대 노인분처럼 바둑판 앞에서 얌전하게 가고 싶다. 그 정도면 선승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지금부터 잘 지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꼭 바둑만이랴. 이젠 이기고 지는 데서 덤덤해질 때가 되었다. 이겨봐야 별 것 없다는 걸 체험으로 안다. 지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늙어서까지 너무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은 꼴불견이다. 넉넉하게 지는 게 아름답다. 남은 삶은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패배도 멋지고 하고 싶다. 잘 지는 연습을 하게 해주는 당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