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외손녀는 두 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자고 간다. 이번에 와서는 엄마 옛날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다. 두 딸이 시집을 갔지만 가족 앨범은 우리 집에 있다. 제 엄마와 같이 앨범을 펴놓고 엄마가 설명하는 얘기를 들으며 깔깔댄다. 그러더니 내 방에 와서 앨범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민다. 30년쯤 전에 찍은 것이다. 어린 손주가 보기에 제 엄마와 외할아버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엄마가 꼭 제 나이만 할 때 모습이다.
이때가 1987년이던가, 아니면 1988년이리라. 내 나이는 30대 중반, 품에 안긴 첫째는 예닐곱 되었으리라. 아마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 모습 같다. 그때는 방학이 되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정도 지냈다 왔다. 자가용이 없었으니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집을 나섰는데 눈보라가 매섭게 치는 날씨였다. 두 아이는 춥다고 울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서, 기차안에서 다섯 시간을 보내고, 또 버스를 타고 시골집까지 가는데 하루가 걸렸다. 아내는 다음에 날씨가 풀리면 가자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은 눈물바람을 하며 고향으로 향했다. 그게 효도인 줄 알았다. 아내는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낸다. 아마도 이 사진이 그 겨울인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는 이 사진을 보며 아빠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지금의 내 늙은 모습과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봐도 영 생경하다.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30년이라는 세월은 나를 이곳으로 밀쳐 놓았다. 우주 공간으로 튕겨 나가 여러 바퀴 돈 뒤 불시에 여기 떨어진 것 같다. 어지럽다. 그건 품에 안긴 아이도 마찬가지이리라. 저 어린 것이 어느덧 40대를 바라보다니. 휴우, 인생 일장춘몽이다.
내일 일도 모르는데 30년 뒤의 일을 어찌 예상할까. 미래에 예비된 각본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 우리는 현재를 무덤덤하게 살아내고 있는지 모른다.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찾아오는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애지중지 하던 것이 무슨 소용 있는가. 개체의 죽음은 그에게는 우주의 소멸이나 마찬가지다.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 연말이 되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앞으로 30년 뒤에는 또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겠는가. 아마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99%다. 아이는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아이는 나를 어떤 아빠로 기억할까. 좋은 아빠든, 나쁜 아빠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죽은 뒤의 모습까지 연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리라. 다만 좋은 아빠로 기억되기는 글렀다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세월이 더 흐른다고 달라질 리가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살 뿐이다.
같은 경험이라도 부모와 자식이 기억하는 형태는 다르다. 과거의 일을 꺼내서 같이 얘기해 보면 금방 안다. 상대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평가하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자식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올가미가 된다.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의 권력 관계는 명확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모의 책임이 중할 수밖에 없다. 다르게 키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내 젊은 모습을 보며 맥이 빠지는 기분만 아니라 과거의 씁쓰레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옛 앨범을 보기가 반갑지 않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다. 나한테는 밝은 기억보다는 숨기고 싶은 기억이 늘 앞장선다. 요사이 꾸는 꿈도 그렇다. 악몽까지는 아니지만 깨고 나면 떨떠름한 꿈이 대부분이다. 무의식 세계가 그만큼 눅눅하고 지저분하다는 뜻이 아닐까.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바탕은 이렇듯 침침하다. 나이가 들수록 운명론자, 비관론자가 되어 가고, 자꾸 성악설로 기운다. 세상의 진실이 그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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