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손주 돌보기

샌. 2018. 12. 28. 10:55

어제 모임에 나갔더니 세 명이 손주를 봐줘야 한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전체가 아홉 명이니 삼 분의 일이 손주에게 발목이 잡힌 셈이다. 우리 나이대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자식과 손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 자식이 결혼하고 손주를 낳게 되면 손주 봐주는 데 묶이게 되는 것이 한국 부모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요사이는 대부분이 맞벌이라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부모가 제일 만만하다. 어찌 된 풍조인지 부모나 자식 모두 당연한 일인 줄 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는 직접 키웠다. 출산 후 몸조리를 위해 잠시 부모의 도움을 받았지만 내내 신세를 지는 일은 없었다. 내 부모님이나 처가의 장인, 장모님도 각각 다섯 형제를 두었고 손주만 스무 명이지만 손주를 맡아서 봐줘야 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삼십 년 사이에 상황은 일변했다. 요사이 같았다면 이 집 저 집에 소환되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둘째가 우리 집 옆으로 이사 온 것은 뭔가 득을 보자는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둘째는 직장을 다니다가 아이를 낳으면서 그만두었다. 수입이 반으로 줄었지만 엄마가 직접 키우는 게 돈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우리는 환영했다. 물론 손주 보는 부담을 덜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무언가 일을 해 보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여느 조부모처럼 손주에 온전히 매달려야 한다. 주말에는 첫째 손주, 평일에는 둘째 손주다. 앞이 캄캄하다.

 

우리 삶이 있으니 네 새끼는 네가 알아서 키우라고 야멸차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힘들게 사는 자식이 보이는데 뿌리칠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많은 부모의 심정이 그러할 것이다. 어찌할 수 없음과 일말의 보람이 공존하는 게 손주 돌보기다. 여기에도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있다. 아내를 보면 안다. 아내는 생활이 묶이는 것보다 손주 보는 재미가 더 크다고 한다. 나는 반대다. 손주 때문에 왜 내 삶이 제약을 받아야 하는지 투덜거리는 게 먼저다.

 

은퇴하고 자식 출가시킨 뒤의 꿈은 컸었다. 제주도 생활을 계획하고 집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생길에 무슨 장애가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돈과 시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로 날아가 버렸다. 미련은 있어도 이젠 운신의 폭이 거의 없다. 거기다 내년은 더 암담하다.

 

어쩌겠는가. 인생이 본래 그런 것을. 무리하게 저항해봐야 쓸데없는 일임을 잘 안다.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몸을 굽힐 뿐이다. 그리고 어느 길이 좋은 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인생사는 새옹지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펼쳐지기 때문에 인생은 흥미로운지 모른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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