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35년 된 셔츠

샌. 2019. 1. 4. 11:50

특별한 옷이 하나 있다. 35년 된 셔츠다. 장롱에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입고 있다. 천에는 보푸라기가 생겼고 소매 끝은 헤져서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지만에서 입기에는 아직 무난하다. 오래된 만큼 편안해서 좋다. 이젠 정이 들어서 조강지처처럼 버릴 수 없다.

 

이 옷에 얽힌 기억이 선명하다. 35년 전인 1984년 봄, 서울 변두리에 있는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새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 학생은 몸이 가늘고 얼굴이 유난히 하얬다. 어머니 얘기로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담임이 잘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학생의 어머니가 선물한 옷이다.

 

셔츠 주머니에는 우산 모양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천의 감촉이 좋고 편해서 나들이할 때 자주 입었다. 고급 브랜드라는 이미지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내 돈으로 이런 옷을 사서 입을 형편은 못 되었다. 이 옷은 아무리 입어도 변형이 되지 않아 좋았다. 역시 비싼 값을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강산이 세 번도 넘게 변한 35년이 흘렀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어떤 우연이 긴 인연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 옷이 그렇다. 환절기에 장롱을 정리할 때마다 이 옷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이번 겨울에도 집에서 유용하게 입고 있다.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입혀 저승으로 보내주겠노라고 아내는 말한다. 굳이 수의를 따로 장만할 필요가 있을까. 생전에 아껴 입은 옷을 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옷에 얽힌 다른 추억도 있다. 그때 학생 어머니가 옷과 함께 촌지도 건넸는데 감사히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촌지를 밝히는 교사는 아니었다. 촌지는 아내에게 넘겼다. 당시는 둘째가 태어났는데 분유 살 돈도 모자라던 때였다. 그때 공무원은 박봉이었다. 혼자의 월급으로 서울에서 아이 둘을 기르기에는 늘 돈이 부족했다. 이웃에서 몇 푼씩 빌렸다가 월급날에 갚고 하는 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눈먼 촌지는 가뭄에 단비였다고 아내는 지금도 말한다. 몇 달 정도의 아이 분윳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남편은 맨날 술타령이라 사는 게 팍팍하고 힘들었다고 아내는 한숨을 쉬곤 한다. 아내에게 이 옷이 연상시키는 과거는 밝지 않다. 그걸 안 뒤부터는 이 옷을 입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 셔츠가 오래 살아남은 비결인지 모른다. 여자는 묘하다. 아픈 과거는 잊어야 할 텐데 도리어 반대다. 자꾸 피드백을 하며 상처를 덧낸다. 이 옷에 얽힌 그 시절 고생담도 아내가 자주 꺼내는 레퍼토리다. 내 귀에는 거슬리지만 참고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의 불편한 속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바라며.

 

35년 전 중학생이었던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좀 더 커서 미국으로 수술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완쾌되어 건강을 회복했을까? 체육 시간이면 친구들과 뛰놀지 못하고 열외가 되어 운동장 구석을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갸름하고 새하얀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띠던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오십쯤 된 나이일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과도 인연을 짓는다. 어떤 물건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사소한 우연으로 이 셔츠는 나와 함께 35년을 동행하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된다는 건 과거 한 때의 풍경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여느 옷들과는 달라진다. 단순히 옷을 걸치는 이상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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