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The Last Station]은 부인 소피아와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고 시골 역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친 톨스토이의 말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이라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는데 전에 책을 읽었던 터라 영화가 더욱 흥미 있었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대개 실망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예외였다. 도리어 원작보다 더 긴장감 있고 영상이 주는 효과가 사실적이었다.
톨스토이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위대한 작가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삶으로 실천하려 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방탕한 삶을 살던 톨스토이는 50세가 넘어서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다. 회심 이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에 의거한 사랑과 비폭력을 도덕과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사유재산을 반대했으며 근대문명을 부정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톨스토이의 과격한 사상은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까지 당하게 된다.
타고르는 간디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간디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온화하고 단순하며 순수하다. 그의 투쟁은 종교적 평온으로 인해 성스럽다. 반면 톨스토이에게는 모든 것이 자만에 대한 오만한 혁명이고, 증오에 반대하는 증오, 열정에 반대하는 열정이다. 톨스토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광폭하고 심지어 비폭력에 관한 그의 가르침마저 광폭하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다혈질인 정열가였다. 그런 톨스토이가 회심으로 인해 내적 모순과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그런 불화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며 나아갔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작품의 저작권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결심한다. 부인 소피아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그녀 역시 톨스토이만큼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소피아는 톨스토이가 자신과 가족은 무시하면서 수제자인 블라디미르만 총애하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여든두 살의 톨스토이는 사랑과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아내 몰래 집을 나간다.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 역시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진정성을 이해받지 못하는 한 인간이었다. 영화는 톨스토이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책과 달았던 점은 영화를 보고 소피아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에는 소피아를 남편의 숭고한 뜻은 외면하고 돈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여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소피아도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한 여인이었다. 톨스토이즘을 표방한 공동체가 커지면서 그녀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져갔다. 남편이나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녀는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소피아는 마지막까지 남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영화는 톨스토이의 비서인 발렌틴과 마샤와의 생명력 있는 사랑을 대비시키면서 신념과 이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묻는다. 톨스토이의 사랑과 평등, 청빈 사상은 많은 추종자를 모으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조직화되고 규모가 커지면 도그마화 된다. 조직의 유지를 위하여 사랑의 공동체에서 사랑은 사라진다. 톨스토이 수제자인 블라디미르의 냉정하고 완고한 태도가 이를 나타낸다. 그는 톨스토이가 죽는 순간까지 소피아의 면회를 막는다. 어떤 이념이라도 인간의 정, 눈물, 연민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 7일 아침, 러시아의 작은 기차역 아스타포보에서 생을 마친다. 마지막에 그는 아내를 찾았고, 소피아는 남편의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