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내 젊은 날의 숲

샌. 2011. 1. 19. 23:01

동료가 이 책을 선물했다. 김훈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내가 김훈의 애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수식이 배제된 건조한 단문이 그분 글의 매력이다.


<내 젊은 날의 숲>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민통선 안의 격리된 수목원에서 꽃과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드라이하다.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고 열정적인 사랑도 없다. 몇몇 등장인물들과 유해발굴단의 유골 묘사를 통해 인생의 쓸쓸함과 무의미성이 그려지고 있다. 김훈의 소설에 공통되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이 조금 스타일을 달리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6.25 때의 전사자 유골발굴단 작업에 참여한다. 발굴 현장의 유골을 세밀화로 그리는 일을 맡은 것이다. 현장을 살피던 중 유골에서 쏟아져 나온 개미들이 서로 싸우는 장면을 본다.


‘개미들은 군데군데서 패를 지어 싸우기 시작했다. 오십 년 전에 죽은 자의 뼈 속에서 한바탕의 격렬한 세계가 들끓고 있었다. 개미들이 입을 벌리면 턱의 폭이 몸통보다 컸다. 개미들은 적의 몸통의 가는 부분, 목이나 허리를 물어서 끊었다. 허리가 끊어져서 두 토막이 난 개미들도 입을 벌려서 적의 허리를 물고 늘어졌다. 잘려진 대가리만으로도 입을 벌려서 싸웠고, 대가리가 떨어져나간 몸통은 방향을 잃고 버둥거렸다. 한 무더기가 죽으면 또 한 무더기가 뼛구멍 속에서 기어나와 싸움터로 나왔다.

- 뼈 속에서 개미떼들이 가끔 나옵니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요. 종자가 같아도 사는 구멍이 다르면 적으로 알고 싸우는 것 같아요.

부사관이 그렇게 말하면서, 군홧발로 개미들의 싸움터를 뭉갰다. 부사관은 군화 밑창으로 흙을 길게 밀었다. 개미들은 가루가 되어 흙에 버무려졌다. 개미들은 보이지 않았다.

개미들의 싸움의 그 적막함과 그 적의의 근원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능선으로 내려왔다.’


50년 전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서 개미들이 똑 같이 싸운다. 개미들의 싸움은 인간 전쟁의 허망함에 대한 고발이다. “종자가 같아도 구멍이 다르면 적으로 알고 싸우는 것 같아요.” 무심하게 내뱉는 부사관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적의를 품고 싸워야 하는지를 반문케 한다. 아무리 고상한 이념으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인간의 행동 역시 개미들의 맹목성에 다름 아니다. 개미나 인간이나 생명의 숙명으로서의 굴레에 매어있지 않은가. 그 본성의 심연은 깊고 어둡다.


김훈의 문체는 거대 비극에 어울린다. <현의 노래>나 <남한산성>의 사실적 장면들이 그렇다. 따라서 <내 젊은 날의 숲>과 같은 잔잔한 작품에는 김훈 특유의 문체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소설처럼 섬세한 여성의 심리를 그려내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라기보다는 중성에 가깝다.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김훈의 글은 비극적 서사를 다루는 장면의 묘사에서 빛이 난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외로운 섬들이다. 마치 숲의 나무들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작가는 우리의 슬픔이 과연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지에 회의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타인의 슬픔의 결에 닿으려 하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두기야말로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관계의 특징이다. 작가는 사랑과 희망 등 온갖 가식을 걷어치우고 인간 본질의 허전함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픔 마음들끼리의 연민이라는 공통분모가 소설을 따뜻하게 한다. “아이구, 불쌍해라.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하다, 불쌍해. 너무 불쌍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깊게 통곡한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아프고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럴수록 더욱 보듬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이 생명의 속성이고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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