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루쉰 단편

샌. 2010. 12. 17. 09:57

“가령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거기에는 창문도 없고 또 절대로 부숴버릴 수도 없는 그런 방이야.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지. 그러니 머지않아 모두 죽을 판이야. 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곧장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치세. 그런데 자네가 마구 소리쳐 아직도 약간 의식이 남아 있던 몇 사람을 놀라 깨우게 함으로써 불행한 그 몇몇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면 과연 자네가 그들에게 잘 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나?”

 

“그러나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루쉰(魯迅)이 ‘자서(自序)’에서 든 비유이다. 루쉰은 의학을 공부하다가 중국 인민을 각성시키기 위해 문학으로 길을 바꾼다. ‘의학이란 결코 중요한 것이 못 되며 국민이 우매하면 아무리 체격이 건장하고 우람해도 무의미한 공개 처형의 관중 노릇밖에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병에 걸려 죽는 것쯤이야 그다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문예를 진흥시키는 길밖에는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문예진흥운동을 부르짖기로 결심했다.’


루쉰에게 문학이란 당신들은 쇠로 된 방에 갇혀 있다는 고함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의 단편집 제목이 ‘눌함(吶喊)’인 것도 이유가 있다. 눌함은 ‘신음하듯 고통스럽게 외친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함성이 용맹스러운 것인지, 비애스러운 것인지, 가증스런 것인지, 아니면 가소로운 것인지 따위는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잠들어 있는 중국 인민을 깨우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그들은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루쉰에게 문학과 예술은 사회 계몽의 한 수단이었다.


루쉰의 단편을 다시 읽었다. ‘아Q정전’ ‘광인일기’ 등이 수록된 <눌함(吶喊)>이라는 단편집이었다. 루쉰의 중국 인민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다시 만났는데 봉건사회의 병폐와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잘 그려져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구습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인민들이다. 그중에서도 ‘고향’에 나오는 룬투라는 인물은 내 고향 동무 B가 연상되어 많이 마음이 아팠다. 시대의 벽에 갇혀 신음하는 사람들이 인간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쇠로 된 벽을 알리는 선지자의 목소리는 필요하다. 언젠가는 깨질 것이라고 두드리는 것이 희망인지 모른다.


‘고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요구할 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한시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른 점이라면 그의 희망을 절박한 것인데 비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라는 점뿐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만약 루쉰이 지금의 중국을 본다면 어떤 사자후를 토할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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