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반일 종족주의

샌. 2019. 10. 26. 11:47

책 첫머리가 우리나라를 '거짓말의 나라'로 규정하고, 우리를 '거짓말하는 국민'으로 조소한다. 몇 가지 통계를 뽑아와 이런 단정을 하는 자체가 너무 건방지다. 읽어보면 책 전체가 이런 편견과 확증편향으로 일관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정직함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나 사례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자료만 골라 논지를 펼쳐나가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종족주의'의 '종족'은 민족보다 저차원 개념이다. 샤머니즘을 신봉하고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간주한다. 일부 극단적 주장에서 드러나는 종족주의를 조심해야 하지만, 우리의 정신문화 전체를 종족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차라리 혐한 시위를 일삼는 일본 극우 단체가 종족주의의 표본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일본 극우의 논리와 같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이 용어를 돌려주고 싶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일 종족주의'라고 규정할 만큼 무조건적인 반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해에 7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일본 여행을 나갈 수 있겠는가. 일본의 좋은 점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건전한 의식이다. 잘못된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국민이 아니다. 우리의 잘못과 책임을 질타하기 전에 일본에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하는 게 옳다.

 

7월에 나온 <반일 종족주의>는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달만에 10만 부가 팔려나가는 걸 보고 매우 놀랐다. 우리 안의 일본이 아직 극복되지 못했다는 신호로 읽혔다. 때마침 일본의 무역 규제로 인한 정부의 강경 대책이 논란이 된 시점이었다. 호기심에 산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그동안 드러내지 못하고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은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는 북에 적대적이면서 친미 성향의 사람들이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제일 비중 있게 다루는 분야는 위안부 문제다. 한 마디로 일본 정부나 군의 강제 동원은 없었고, 위안부는 높은 보수를 받는 자발적인 매춘부였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대표 저자는 이영훈이다. 현재 이승만 학당 교장으로 있는 경제학자다. 그 외에 일제의 토지와 쌀 수탈, 민족정기를 없애려고 박은 쇠말뚝, 일제 말기의 노무 동원, 식민지 근대화론, 독도 문제 등을 다룬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일본이 선점했으니 일본 땅이란다.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도 있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한일간 상호 재산과 채권채무의 조정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국의 일부였으므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불가하다는 논리다. 청구권 협상을 할 때 박정희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협상을 했다.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고 나라를 빼앗아놓고도 합법이라고 하니 날강도가 다름 아니다. 1960년대에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이러니 지금도 일본이 사과와 반성 없이 큰소리 치는 게 아닌가 싶다.

 

'일본 앞잡이'라 비난해도 무방할 정도로 친일 편향된 시각으로 씌워진 책이다. 누구는 구역질이 나는 책이라며 도저히 못 읽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나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끝까지 읽었다. 이런 시각을 가질 수도 있구나, 라는 게 신기했다. 일부 내용은 경청해야 할 부분도 있다. 막무가내식 일본 비판은 삼가야 맞다. 그러나 일본 우익의 외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내용에는 거부감이 든다. 진실이라면 불편해도 감내해야겠지만 무지한 내가 봐도 왜곡이 심하다. 일제가 남긴 자료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자주 들은 얘기가 있다. 어머니는 일제 말기에 10대 소녀였다. 예천의 농촌 마을에 사셨는데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며 처녀를 마구잡이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도망을 가거나 일찍 시집을 가서 화를 피했다고 한다. 주로 공장 근로자를 뽑는 정신대였을 것이다. 이 책 저자가 주장하듯 모두가 자발적 응모였다는 말과는 상반된다. 어머니가 거짓말을 꾸며할 리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믿는다. 위안부 할머니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민중의 증언은 가짜라며 무시한다.

 

이 책을 논박할 공부가 안 되어 있어 유감이다. 분명히 <반일 종족주의> 내용을 반박할 자료도 많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책을 보는 내내 불쾌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친일 청산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된 직후에 때를 놓치니 지금껏 삐거덕거린다. 잘못된 과거는 제대로 털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반대급부가 너무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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