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일본산고

샌. 2019. 10. 18. 09:46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고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우리 정부도 맞대응하며 일본과 맺은 지소미아를 폐기했다. 처음 우려한 것과는 달리 우리 산업계에 미치는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부품 국산화 등 탈일본으로 가는 계기가 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지금은 양국 모두 숨 고르기를 하는 것 같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NO JAPAN' 캠페인이다. 일본 제품 불매와 일본 여행 안 하기 운동이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과거 같으면 불이 붙었다가 금방 사그라지는데 이번은 달랐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들의 혐한 소동도 반일 감정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서 아사히 등 일본 맥주는 거의 전멸 수준이고, 설화에 휩싸인 유니클로도 타격이 크다. 일본 자동차는 작년 동기와 비교해 판매량이 반 토막이 났다. 일본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객 통계를 보면 작년에 비해 40% 정도밖에 안 된다. 국내 분위기를 보면 아직 그만큼 팔리고 여행을 간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얼마 전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일식집에서 아사히 맥주를 마시는 사진을 올렸다. '그래도 나는 일본 맥주를 마시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의 취향이고 자유의 문제니까. 그러나 염치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아사히 맥주 마시는 걸 굳이 자랑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불매 운동을 하는 다수를 조롱하는 짓거리가 아닌가 말이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면전에서 치킨을 시켜 먹는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하는 족속도 있으니 이는 약과인지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대놓고 일본을 찬양한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서는 위안부나 징용 노동자의 강제성을 부정한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경제가 산업화를 이루었다고 말하고, 한일협정으로 보상 문제가 완결되었으니 개인의 피해 청구 권리를 부정한다. 일본 극우의 주장과 다를 게 없다. 우리 학자에 의해서 이런 책이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박경리 선생이 쓴 <일본산고(日本散考)>를 읽었다. 선생이 쓴 일본에 관한 글을 한데 묶은 책이다. 선생은 대놓고 자신을 '반일(反日) 작가'라고 부른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 없는 일본인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부제가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이다.

 

작가로서 선생은 일본 문학의 탐미주의를 섬이라는 갇힌 사회에서의 도피 수단으로 해석한다. 탐미가 자기 파괴로 나아가면 할복을 미화하고 가미카제라는 자살 특공대로 연결된다. 일본 소설에서 선생은 일본인의 사디즘과 마조히즘 성향을 읽어낸다. 폐쇄된 세계에서 인류애를 가진 깊이 있는 사상이 나올 수 없다.

 

일본이 한국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 책에 자주 나온다. 우리를 열등 민족으로 보는 관점은 고대부터 형성된 것 같다. 임진왜란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한국을 몇 수 아래로 보는 의식이 각인되었다. 식민 지배에 대한 가해는 무시하고 도리어 은혜를 베풀었다고 여긴다. 한국을 배은망덕하며 자기들 일에 발목만 잡는다고 느끼니 혐한 열풍이 분다. 혐한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초조함의 표현인지 모른다.

 

이번에 일본이 수출 규제를 단행한 배경에는 이런 인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의 한국은 이미 큰 나라로 성장하고 있다. 일본을 추월한 영역도 여럿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에 근접하거나 넘어서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뻗어나는 한국의 기를 꺾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발표되고 우리 정부가 강경 대응을 할 때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일본과 맞서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불안해 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이 스스로 위축되고 피해 의식에 젖어 있는지 모른다. 식민사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선생은 <일본산고>에서 민족의 자존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일본을 정확하게 알면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다. 이젠 정신의 극일(克日)을 할 때다. 왜곡된 역사와 혼란스러운 현세 속 우리에게 던지는 선생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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