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의 '뭣이 중헌디'

손주가 집에 오면 할머니는 뭐든지 먹이고 싶어 한다. 어제는 손주가 좋아하는 짜장을 준비했다. 손주는 짜장을 밥에 비벼 먹는 짜장밥을 무척 좋아한다. 유치원과 태권도 학원에 다녀와서 배가 고팠는지 손주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천천히 먹으라고, 안 그러면 체한다고 물을 권하면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손주는 캑캑거리더니 급기야 먹은 걸 토하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손쓸 겨를이 없었다. 손주는 울상이 되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할머니는 그릇을 치우며 놀리듯 말했다.

 

"그것 봐. 천천히 먹으랬지. 아, 이 아까운 짜장을 어쩌나."

 

손주의 심드렁한 얼굴이 점점 화난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렇게 톡 쏘는 것이었다.

 

"할머니! 사람이 중요해? 음식이 중요해?"

 

우리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섯 살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말이야 분명 옳지. 그러나 아이 입에서 아이답지 않은 말을 들을 때 당혹감을 느낀다. 아이 옆에 있다 보면 이런 혼란스러움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손주의 훈계에 우리는 주눅이 들어 버렸다.

 

영화 '곡성'에서 어린 효진이가 아빠에게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따지며 외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신이었다. 송강호가 분한 효진이 아빠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해져서 딸을 쳐다보던 모습이 선명하다. "뭣이 중헌디?"는 우리 내면에 준 충격이 상당했다. 생각 없이 사는 삶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죽비라고 누구나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제는 손주가 다른 버전으로 우리를 내리쳤다. "사람이 중요해? 음식이 중요해?"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일화다. 공자 집 마구간에 불이 나서 홀라당 타 버렸다. 공자가 퇴청해서 "다친 사람은 없느냐?"고 물으시고는 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위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언행임을 살아갈수록 절감한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사람보다 다른 무엇이 항상 위에 있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이라는 이름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세파에 휩쓸려 흘러가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세상적으로 잘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면서 살고 있는가? 잊고 지내던 화두를 손주가 문득 던져 주었다.

 

"뭣이 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