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사소한 부탁

샌. 2020. 7. 20. 11:26

책을 덮고 제목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사소한 부탁', 여기에 담겨 있을 여러 의미를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겸손의 마음을 읽는다. 내가 사유하고 주장하며, 글에 담은 내용이 '사소'하다는 걸 자각하는 건 얼마나 중요한가. 세상을 향한 의견 제시 또한 정중한 '부탁'이어야 한다. 요사이처럼 제 또는 진영의 목소리만 크게 난무하는 세태에서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황현산 선생의 <사소한 부탁>은 선생이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발표한 글이 실려 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다. 선생의 글에서는 지성인의 향기가 난다. 글이 깊이가 있으면서 담박하고 간결하다. 선생의 인품이 어떠할지 글로써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감상을 적으면서 진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진보주의자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 - 이 말에 한참을 머물렀다. 진보주의자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한, 진보적 정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선생은 영화에서 파비앙과 그의 동료들이 모여 사는 산골의 농가를 예로 든다. 이 낙원은 저 행복한 세계가 이 불행한 세계에 설치한 연락처이며, 이 결여된 세계에서 저 완전한 세계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예행연습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지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행동이 필요하다. 진보는 관념으로의 망명이 아니라 꾸준한 실천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있는 한 공동체가 생각난다. 의기투합한 몇 사람이 힘을 뭉쳤지만 지금은 상당한 난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불행한 세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이 다시 힘을 얻길 기원한다. 도시의 진보주의자 역시 그들 나름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념이 아닌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입으로만 나불대는 진보는 진보를 가장한 사기꾼이며 위선자에 불과하다.

 

<사소한 부탁>은 여러 가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다. 이 불행한 세계에서 진보주의자로서의 제 소신을 지키며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욕망을 내려놓고 고뇌와 벗하며야 하기 때문에 가장 살아볼 만한 길이 된다고 나 역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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