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읽(10) - 좀머씨 이야기

샌. 2021. 5. 5. 11:43

20년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좀머씨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좀머씨에 연민을 느끼면서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씨의 외침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 내 마음 상태가 좀머씨와 닮은 바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좀머씨 이야기>는 좀머씨 개인의 불행보다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서 더 비중 있게 읽힌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 따스하게 읽힌 이야기였다. 특히 화자와 관련된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재미있고 공감이 되었다.

 

두 개의 에피소드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카롤리나와, 미스 풍켈이라는 피아노 선생님에 관계된 일화다. 둘 다 어떤 상실감과 관련되어 있다. 잔뜩 기대했던 카롤리나와의 만남이 깨진 허전함, 그리고 풍켈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죽을 생각까지 든 소년의 절망감이다. 이때 좀머씨의 고독하게 그러면서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화자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풍경이다. 화자는 아픔을 겪으면서, 더 중요하게는 좀머씨를 통해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간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비인간적이다. 세상의 한 켠에는 상처 받고 소외된 인간도 살아간다. 어른들은 좀머씨에게 관심이 없지만, 화자는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좀머씨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도 화자다. 좀머씨는 사라지고 화자는 더 이상 나무를 타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어쩌면 좀머씨는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겠다.

 

좀머씨는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삶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의 걸음은 세상에 대한 항거였는지 모른다. 그는 끝이 언제인지 알고 죽음도 스스로 선택한다. <좀머씨 이야기>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작가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느껴진다. 내 책은 '열린책들'에서 1996년에 초판 32쇄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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