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49]

샌. 2022. 6. 27. 12:41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계명을 알고 있겠지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손해를 끼치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가 말했다.

"선생님, 그런 것은 소년 시절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고 대견히 여기며 말씀하셨다.

"한 가지가 모자랍니다.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겨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재산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구려!"

제자들은 듣고 놀랐다. 예수께서 거듭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구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욱 놀라 서로 쳐다보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나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으로서, 그 백 배를 되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현세에서는 박해도 당하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을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말째 되고 말째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 마르코 10,17-31

 

 

예수의 메시지는 단호하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를 찾아온 부자는 슬픔에 잠겨 근심하며 물러갔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부자가 그때나 지금이나 몇 사람이나 될까.

 

종교개혁 전까지 가톨릭에서는 부와 탐욕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장애물로 여겼다. 중세의 가톨릭이 타락했어도 청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흐름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부를 대하는 시각이 달라졌다. 부르주아라는 신흥 경제 세력을 대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속의 기독교는 아예 대놓고 부를 하느님의 축복이라 설파한다. 십일조 잘 내고, 목사 잘 섬기고, 믿음 생활 열심히 하면 하느님이 축복을 주신다는 설교는 교회를 처음 나갈 때부터 귀가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예수는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서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 가난을 야기하는 사회적 불의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지적하는 강단의 설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대목은 기독교인이라면 깊이 묵상해야 할 화두가 아닐까. 내가 가진 부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합법적이라고 정당하지는 않다. 약탈의 경제 구조 속에서 나의 부는 타인의 눈물과 연관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나의 부를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것을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기본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인간의 탐욕에 편승하는 교회일수록 번성한다.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란다. 부자라야 자선 사업을 하고 율법도 잘 지킬 수 있는데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상식에도 어긋났는가 보다. 그러면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예수는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분이라고 답한다. 이 말씀은 부자도 열심히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은 부자를 회심시켜 탐욕을 버리도록 하실 분이라는 뜻이다. 결코 부자를 위한 변명이 아니다.

 

뒷부분에는 '버린다'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현대의 관점으로 바꾸면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맘몬을 향한 숭앙이야말로 현대의 우상 숭배다. 부에 대한 집착을 넘어설 때 마음의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느낄 것이다. 그 단계가 되면 세속의 부가 따라오든 아니든 상관 없다. 가치관의 전복이야말로 첫째와 말째를 통째로 바꾸는 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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