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56]

샌. 2022. 9. 17. 10:30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성전에서 팔고 사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여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일도 금하셨다. 그리고 가르치셨다.

"성서에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씌어 있지 않소? 그런데 당신네는 '강도 소굴'로 만들어 버렸소."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듣고는 그분을 없애 버릴 방도를 찾았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했으니, 군중이 모두 그분 가르침에 매우 경탄했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자 일행은 성 밖으로 떠나갔다.

 

- 마르코 11,15-19

 

 

예수살렘 성전의 예수는 갈릴래아의 예수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전투 모드로 바뀐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아예 '강도 소굴'이라고 비난한다.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이 놓인 상과 의자를 둘러엎고 물건 나르는 일도 금했다는 것은 성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예수가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의 이름을 빌려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예수가 유대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종교 의식에만 매달리는 전통적인 유대교는 혁파해야 한다는 의식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성전을 통해 권력과 이득을 취하는 기득권에게 예수는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군중의 눈이 두려웠다는 것은 예수에 동조하고 따르는 무리가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종교적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유대 민중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힘을 하나로 결집할 동력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예수는 자신의 과격한 행동이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민중을 일깨우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할까, 무비판적으로 체제에 순종하는 신자들에 대한 채찍이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만약 예수가 지금의 한국 교회에 오신다면 뭐라고 하실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분이 찾아가실 곳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전혀 엉뚱한 곳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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