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57]

샌. 2022. 9. 26. 11:53

일행이 새벽에 지나가다 보니 저주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있었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느님을 믿으시오. 진실히 말하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면서도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대로 되리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거니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시오. 그러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거든 그를 용서하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 마르코 11,20-26

 

 

예루살렘 성전과 병치되어 나오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기서 명확해진다. 오염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층을 겨냥한 이적일 것이다. 종교가 민중을 억압하는 굴레가 되는 현실을 예수는 방관할 수 없었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기존의 썩은 질서는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수밖에 없다.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예수는 믿음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정말 기도하면 다 이루어질까"라는 의문이 생기면서도 그대로 믿으려고 애를 썼다. 지금 돌아보면 기도를 통해 바라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많았다. 기도를 한다고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하느님을 매개로 한 내 욕망의 투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의 이 말씀에는 기도의 성취 여부를 떠나 깊은 영적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기도란 현실세계에서의 피상적인 기구(祈求)가 아닌, 하느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내적 지향이 아닐까. 영혼의 고차원 단계에 진입하면 기도가 그대로 실현된다는 예수의 말씀을 체현하게 될지 모른다. 지상의 우리가 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다가는 허다하게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일치에 가장 방해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원한이 아닌가 싶다. 모든 존재에 깃든 신성을 생각한다면 타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미워한다는 것과 같다. 이걸 풀지 않으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음은 분명하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이 절실히 와 닿는다. 그러나 우리가 타자를 얼마나 진실히 용서할 수 있을까. 가톨릭의 경우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본다고 타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죄를 용서받았다는 가벼운 자기 위안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까. 고해실 문을 나서고 한 시간 뒤의 내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인간 내면의 심층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거든 그를 용서하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예수는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주신 다음에 이 말씀을 하셨다.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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