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아를 떠나올 때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달린 것을 멀리서 보시고, 혹시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다가가셨는데,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무를 향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영영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는 일이 없으리라."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 마르코 11,12-14
성경을 읽을 때면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주로 구약에 많지만 신약에도 몇 군데 있는데 이 장면이 그렇다. 처음 성경을 접했을 때나 지금이나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우선 아무 죄 없는 나무를 저주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시장하시다지만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앞으로 영영 열매를 맺지 말라니, 너무 자기중심적이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무화과가 맺히는 철이 아니라고 마르코는 분명히 부언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아무리 봐도 비유인 것 같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지금 예수와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비장한 도정에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여느 순례객처럼 하느님을 경배하고 속죄 제물을 바치려는 게 아니다. 성전을 장악한 채 종교로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유대교 권력층들과 정면대결하기 위해서다. 짓눌린 민중을 해방하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기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이며 동시에 성전을 통해 자기 이득을 취하는 무리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도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신약(新約)'이라는 이름에 그런 영적 혁명이 내포되어 있다. 당시 예수의 의도와 지금의 기독교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제부터 영영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는 일이 없으리라."
잎만 무성한 그럴 듯한 생김새로 민중을 현혹하지만 실은 민중을 먹여살리는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 오히려 인간적 삶을 방해하는 - 타락한 유대교와 세상의 악한 시스템에 대한 예수의 부정이자 저주다.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 본진으로 향하는 예수의 단호한 의지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