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52]

샌. 2022. 8. 2. 10:24

다른 열 제자가 듣고서 야고보와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 마르코 10,41-45

 

 

앞의 장면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다른 제자들 몰래 예수를 찾아가서 얄미운 짓을 했다.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가 아니라 한 바탕 싸움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성질이 괄괄한 베드로가 가만있었을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수준 미달인 제자들을 타이르신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에 관한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 정신의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생애가 바로 섬김의 삶이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셨다. 그런데 기독교는 구속(救贖)과 은혜에 너무 비중을 두다 보니 섬김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할 뿐이다.

 

제자들이 상상하듯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고 제자들이 권력을 차지한다고 한들 통치의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는다면 로마의 지배 상태와 비교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두머리만 로마인에서 유대인으로 변할 뿐 기득권은 세도를 부리면서 민중들을 내리누를 게 뻔하다. 예수가 바라는 것은 지배 체제 자체의 변혁이다. 억압받는 민중이 없는 세상이다. 예수는 지엽적인 개혁이 아니라 뿌리로부터의 혁명을 꿈꿨다.

 

그래서 예수는 섬김의 정신을 강조한다. 섬김, 절제, 겸양은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할 근본 가치가 아닐까. 노자가 말한 세 가지 보물 - 자(慈), 검(儉),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 역시 같은 의미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적 가치관의 전복이다. 이런 섬김의 문화를 실천하고 확산하는 몫을 기독교가 감당해야 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를 벗기고 때리고 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마침 한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레위 사람도 와서 보고는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와서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맨 다음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객사로 데려다가 돌보아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객사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소,'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사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자, 예수께서 이르셨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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