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금주 200일

샌. 2023. 2. 18. 10:58

술을 끊거나 줄이는 뜻을 가진 낱말에 단주, 금주, 절주가 있다. 사전에는 단주나 금주 모두 술을 끊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내가 볼 때 둘 사이에는 느낌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단주(斷酒)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술을 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몸에 병이 생겨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경우다. 본인의 생각과 관계없이 무조건 술을 끊어야 한다. 금주(禁酒)는 외부적인 압력보다 본인의 의지로 술을 끊는 경우다. 어감상 단주보다 부드럽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시 마시게 될 수도 있다. 절주(節酒)는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다. 절주만 된다면 굳이 술을 원수 보듯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술을 끊은지 200일이 되었다. 나에게는 단주와 금주 중 금주라는 명칭이 적당할 것 같다. 그래서 '금주 200일'이다. 스무 살 무렵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일흔이 넘었으니 내 음주 역사는 50년이 된 셈이다. 위장에 탈이 나서 서너 달씩 술을 끊은 적이 가끔 있었지만 지금처럼 반년을 넘긴 경우는 처음이다. 오직 내 의지의 결단으로 이만큼 지켜냈으니 이제 술의 유혹은 거의 극복한 셈이다.

 

술을 끊으면 후유증에 시달릴 줄 알았는데 싱거워서 솔직히 의외였다. 20년 전에 담배를 끊을 때도 비슷했다. 금단 증상으로만 판단하면 나는 술과 담배를 그다지 애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30년, 50년 지기 친구가 떠났어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으니까.

 

술은 인간의 감정을 들뜨게도 하고 가라앉히기도 한다. 기분이 좋을 때 술을 마시면 더욱 기분이 업 되고 활력이 솟는다. 답답할 때는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기도 한다. 알코올의 긍정적인 작용이다. 그러나 반대일 때도 있다. 분노에 불을 붙이고 공격적이 되게 한다. 술만 취하면 상대를 비난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 속에 있는 쓰레기를 여과 없이 쏟아낸다.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알코올의 부정적인 작용이다. 그렇다면 술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물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박카스 신을 향한 찬양가를 너무 세게 불러서는 안 된다.

 

집 베란다에는 작년 봄에 사 두었던 소주 박스가 먼지를 쓴 채 놓여 있다. 술을 끊으니 삶이 무미건조해진 건 사실이다. 감정 상태에 따라 또는 날씨에 따라 술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부러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술이 주는 위안이 분명히 있지만, 하나를 얻으면 셋을 잃게 되는데 손해 보는 장사는 해서 뭣하냐는 것이다. 애주가 입장에서는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말한다.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술을 멀리 해도 뭐 그런대로 괜찮다.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술 취한 사람들을 보면 술이 주는 위안과 낭만은 잠깐의 말초적인 쾌락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정도는 포기해도 아까울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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