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77]

샌. 2023. 4. 20. 19:20

군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인 궁전 뜰 안으로 끌고가서 온 부대를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더니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며 굽실거렸다. 또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무릎 꿇어 절했다. 그렇게 놀리고 나서 자색 옷을 벗기고 겉옷을 입힌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러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지나가던 한 사람을 붙잡아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와 루포의 아버지인데 마침 들에서 오던 길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골고타'라는, 번역하면 '해골터'라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몰약 탄 포도주를 드렸으나 그분을 받으시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각자 차지할 몫을 놓고 주사위를 던졌다. 이윽고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니, 때는 오전 아홉 시였다. 죄목 명패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수와 함께 두 강도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달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독했다. 

"하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세우겠다는 자야.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하려무나."

대제관들도 율사들과 어울려 놀렸다. 

"남들은 구했지만 자신을 구할 수 없나 보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은 터인데."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도 그분을 모욕했다.

 

- 마르코 15,16-32

 

 

예수의 체포에서 선고, 처형까지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채 1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도 도망치거나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예수는 고독하고 비참하게 마지막 길을 갔다. 로마 병사들의 조롱과 모욕은 십자가 위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자가 명패에 걸린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로마가 임명한 정식 유대인의 왕을 부정한 것이니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죄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유대교 기득권층의 모략이었고 총독 빌라도는 알면서도 동조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이런 억울한 희생자는 있게 마련이다. 체제에 도전하는 자는 기득권층이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처형도 비슷했다. 군중의 인기를 끌면서 지도층에 바른 소리를 하는 요한을 두고 보지 못했다. 현대에서도 준법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횡포를 부리는데 그 시대에야 오죽했겠는가.

 

유대인 군중, 로마 병사, 대제관과 율사들, 심지어는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강도들마저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했다. 체포되었을 때부터 이미 고립무원의 예수였다. 역사상 예수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죽임을 당할지언정 대부분은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조차 모두 도망쳤다.

 

예수가 인류 구원이라는 지고지순한 사명을 띄고 유대 땅에 찾아오셨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그분은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한 사랑의 길을 한 치의 흐트럼 없이 걸으셨다는 점이다.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달래고 함께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셨다.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으셨다.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봤거나 전해 들었던 제자들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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