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78]

샌. 2023. 5. 3. 11:46

정오가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번역하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곁에 있던 이 가운데 몇이 듣고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 해면을 식초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서 예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면서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봅시다" 하였다. 예수께서 큰소리를 지르며 숨지셨다. 이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마주 서 있던 백부장이 예수께서 외치며 숨지시는 것을 보고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자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면서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분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 마르코 15,33-41

 

 

예수의 처형은 전광석화로 이루어졌다. 전날 밤에 체포되어 최고회의의 심문을 받고,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진 뒤 반역 행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곧바로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처해지고 오후 세 시에 운명하셨다. 체포에서 죽음까지 채 스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십자가 처형의 잔인함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발가벗겨져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고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한다. 목숨이 끊어지지 못하고 하루 이상 매달려 있는 경우도 있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예수는 대여섯 시간 만에 죽음을 맞았다. 그만큼 기력이 약했다는 뜻이겠다. 십자가형은 로마 식민지에서 정치 반역자에게 행한 형벌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예수의 죄명이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했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정치범이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누명이었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명분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용납할 수 없는 위험 인물이었다. 즉, 예수가 처형당한 이유는 지배 체제에 저항하고 불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 정신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저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사는 것은 예수의 삶을 닮으려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는 육체의 고통보다 어쩌면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지 모른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처절하게 외쳤다.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의 이 이 고백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이 이런 식으로 끝이 날 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 운동은 실패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고독과 회한의 탄식이었다. 그렇기에 예수의 외침은 더 감동으로 다가왔다.

 

뒤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가 시편에 나오는 기도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오히려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기도문을 읊는 예수보다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직설적으로 절규하는 예수의 이미지에 너무 젖어있던 탓이었는지 모른다. 끝없는 추락과 절망을 지나서 새롭게 부활하는 예수가 더 드라마틱하게 나에게는 보였다.

 

예수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시중들며 따라다니던 여러 여인들이었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차린 사람은 처형을 주관한 로마 군인인 백부장이었다. 백부장은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예수에 내재한 신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없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또는 공황 상태에 빠져 예루살렘 시내 어딘가에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하찮게 취급받는 여자들과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사살은 의미심장하다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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