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76]

샌. 2023. 4. 9. 10:29

바로 그 새벽에 대제관들이 원로들과 율사들과 함께, 곧 온 최고회의가 결의를 하여, 예수를 묶어 데려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인 왕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대제관들이 여러 가지로 그분을 고발했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얼마나 여러 가지로들 고발하고 있는지!"

그러나 예수께서 더는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니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청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폭동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빠라는 자가 구속되어 있었는데 군중이 올라가서 관례대로 해 주기를 청하자 빌라도는 "유대인 왕을 풀어주라고요?" 하고 대꾸했다. 사실 그는 대제관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제관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청하게 했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네가 말하는 유대인 왕은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또 외쳤다.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빌라도가 말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이오?"

그러자 그들이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이윽고 빌라도는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하여,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넘겨주었다.

 

- 마르코 15,1-15

 

 

유대교 최고회의에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길 때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로마 제국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란의 수괴라는 올가미를 씌운 것이다. 일종의 정치범이었다. 사실 예수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한 적도 행동한 적도 없었다. 일부 과격한 추종자들이 예수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로마군을 축출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심문을 하는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이상하게 침묵을 지킨다.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고작 이런 애매한 대답을 한다.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변명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빌라도는 예수에게 특별한 죄가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로마 당국이 두려워하는 폭동을 주동할 만한 위험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유대교 안에서 일어나는 주도권 다툼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빌라도는 내심 너희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라고 되돌려 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폭동을 일으킬 의도가 없었다고 예수가 대답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침묵한다.

 

대제관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결국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든다. 대제관들과 빌라도가 합작한 엉성한 짜맞추기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선고였다. 우매한 군중은 사건의 배경이나 내막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침묵과 고독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분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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