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작가의 최근 글을 만나는 기대감에 책을 열었으나 1970년대에 나온 수필집이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20대와 30대에 쓴 글인데 책 제목에 낚인 감도 있다. '뜬 세상에 살기에'라는 제목만 보고 노년에 들어 쓴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은 작가의 청년기 삶과 생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소설가로 등단한 계기,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에 대한 단상, 다양한 세평들이 들어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의 대학 생활은 흥미로웠다. 동인지 <산문시대>를 만드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학창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활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이 수필집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무진기행>의 분위기가 작가를 그대로 닮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한 글에서 <무진기행>을 쓰게 된 동기를 얘기한다. 1963년에 학점 미달로 대학교 졸업을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왜 서울에서 실패하면 꼭 고향을 찾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하나의 생각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고 먼저 동인들에게 보여줬더니 혹평을 받아 찢어버리려고 했으나, 원고 마감이 가까워진 잡지사에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되었고 뜻하기 않게 자신의 대표작이 되었다고 한다. 가장 우울한 시기에 쓴 작품이 아마 세상의 우울한 이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가지게 된 게 아니냐고 작가는 추측한다.
<뜬 세상에 살기에>는 50년 전의 고전적인 문체와 마인드를 접할 수 있어 좋았다. 고풍스럽다고 할까, 오래 익은 된장 같은 맛이 나는 글들이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맛을 오랜만에 느꼈다. '고향의 봄'이라는 작가의 짧은 수필 한 편을 옮긴다.
고향의 봄
순천의 겨울은 바람의 계절이다. 눈도 그다지 많이 내리지 않고 얼음도 두껍게 얼 줄 모르는 순천의 겨울은 멀리 지리산 쪽에서 불어 내리치는 찬바람만으로 황량하다. '오리정 아이들'은 '오리정 바람' 속에서, '장대 아이들'은 '장대 바람' 속에서 연을 날리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북데기 싸움'을 하며 겨울을 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어린이 잡지에 예쁘게 인쇄된 눈사람이나 스케이팅하는 모습은 순천의 아이들에게는 먼 나라의 동화 같다. 밤새도록 문풍지를 울리는 세찬 바람뿐인 겨울은 순천의 아이들에게 인생이 가없는 허망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동천의 겨우내 메말랐던 자갈밭에 물기가 어리고 이윽고 북쪽 산간지방에서 눈 녹은 물이 유리처럼 맑게 흐르고 그 물가에서 어머니들의 빨랫방망이 소리가 산뜻하게 울려오고, 탱자나무 골목길이 질퍽거리고, '해창' 넓은 들 너머에서 소녀의 입김 같은 바람이 간들대며 불어오고, 장날 모여드는 두멧사람들의 짐 위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또 이윽고 동천 방죽, 죽도봉산, 수원지, '순고(順高)' '농전(農專)' '여고(女高)'의 교정 벚꽃이 꿈 바로 그것의 빛깔인 듯 아련히 번져가고, '매산(梅山) 등' 숲이 해맑은 연둣빛으로 살랑대고, 한 뼘쯤 자란 보리밭의 기나긴 이랑들이 술 취한 아버지처럼 후끈후끈 단내를 뿜어내고 그 하늘 구름 속에서 종달새들이 장난질 치며, 그래 그렇다, 순천은 바야흐로 다시 봄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순천의 인생은 봄철의 밥상에 오르는 '정어리 찌개'처럼 비린내 나지만 참 맛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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